트렌치코트는 클래식, 가을, 우아함 등 정적인 수식어의 호위를 받으며 꽤 오랜 세월 동안 베이식한 아이템의 대명사로 자리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가을의 교복 같던 트렌치코트를 잊어야 할 때다. S/S 시즌, 메머드급 브랜드들이 과감한 시도로 트렌치코트의 새 지평을 열었으니 말이다. 이들이 트렌치코트를 해석한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발렌시아가는 데님 재킷 앞판에 트렌치코트를 목에 건 듯한 형태로 덧댔고, 셀린느는 두 벌의 코트를 길게 이어 붙여 풍성한 실루엣을 완성했으며, 알렉산더 맥퀸은 라펠과 허리 벨트를 두 겹으로 디자인해 구조적인 변형을 꾀했다. 컷아웃 디테일로 리듬감을 부여한 경우도 있다. 데콜테 라인 위를 과감하게 잘라 없앤 메종 마르지엘라(S/S 시즌 존 갈리아노는 무려 일곱 개 이상의 룩을 트렌치코트에서 영감 받아 완성했다)의 트렌치코트나 드레스처럼 보이도록 어깨 부분을 도려낸 펜디의 룩이 대표적인 예다. 반면 엠에스지엠과 토가, 막스마라는 각각 이케아의 프락타 쇼핑백을 연상시키는 파란 원단과 PVC, 속이 훤히 비치는 시스루 소재로 독특함을 더했다.
물론 로에베, 르메르, 발렌티노처럼 고상함의 결정체로서의 트렌치코트를 계승한 브랜드도 적지 않다. 그러나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룩에도 프린지 장식이나 오버사이즈 숄더, 과장된 견장 디테일 같은 반전 요소는 숨어 있다. 즉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모든 디자이너가 트렌치코트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일에 동참했다는 얘기다.
버버리의 CEO를 거쳐 애플의 수석부사장으로 재임 중인 안젤라 아렌츠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트렌치코트를 가져야 한다. 또 모두를 위한 트렌치코트가 존재해야 한다.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말이다.” 트렌치코트가 어느 때보다 다채롭게 변주되고 있는, 그리하여 누구든 컬렉션이나 쇼윈도를 보고 입맛에 맞는 옷을 낚아 올리기만 하면 되는 이번 시즌은 그녀의 말을 체감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