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남부 페캄(Peckham) 지역, 기차가 지나다니는 선로 아래, 주차장과 타이어 가게가 즐비해 런던 동부 빈민가를 연상시키는 장소에서 환경보호 철학을 담은 패션 혁명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디자이너 리처드 퀸의 모습 역시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티셔츠 위에 파란색 면 남방을 대충 걸치고 배기 핏 데님 팬츠를 입은 채 야구 모자를 쓰고 운동화를 신은 모습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등교하거나 축구 하러 가는 학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프린터가 여러 대 놓인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엘리자베스 2세 어워드 영국 디자인 상의 첫 수상자다. 이 상은 뛰어난 창의성을 발휘해 사회에 기여하고 환경보호 정신을 열정적으로 실천하는 영국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그는 컬렉션이 열리기 며칠 전에 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팀 모두 컬렉션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어요.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 만큼 엄청난 소식이라 알리지 않기로 했죠. 패션쇼 준비를 무사히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의 수상과 더불어 영국 여왕이 최초로 참석한 패션쇼라는 점은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갑작스레 유명해진 그는 지난봄 열린 패션계 큰 행사 중 하나인 멧 갈라(Met Gala)에서 패션 역사를 또 한번 새로 썼다. 행사 공동 주최자인 아말 클루니가 그의 드레스를 입은 것이다. 화려한 꽃무늬를 프린트한 반짝이는 드레스였다. 행사 참석자에게 자신들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히기 위해 전 세계 내로라하는 유명 브랜드들이 필사적으로 경쟁을 벌이는 멧 갈라에서 신인 디자이너가 활약한 것은 디즈니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대 사건이었다.
2016년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 대학을 졸업한 리처드 퀸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꽃무늬, 빈티지한 벽지 무늬 직물을 직접 생산하기 위해 프린트 기기로 유명한 엡손(Epson)과 접촉해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용할 프린터를 주문했다. 그는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젊은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작업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다. “저를 비롯한 디자이너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금이에요. 프린트를 자체 공장에서 생산하면서 자금 운용 부담이 많이 줄었어요.” 런던에 자체 공장을 갖게 된 리처드 퀸은 현재 젊은 신진 디자이너와 함께 작업할 뿐만 아니라 버버리와 J.W. 앤더슨 등 유명 브랜드에서 사용할 직물에 프린트를 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 프린트 공장은 환경보호에도 이바지한다. 기존 프린트 직물 제작 과정은 비용이 발생할 뿐 아니라 지구 환경에 큰 손실을 안기는 것이 현실이다. 영국 외 지역에서 생산되는 직물은 항공편으로 평균 4만 킬로미터를 이동하고 이산화탄소 5킬로그램을 배출한다. “기존 직물 프린트 공장은 이탈리아와 터키 그 외 동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생산 과정에서 물을 많이 사용하죠. 반면 제 작업실에서 프린트하는 작업은 빠르고 효율적이며 결정적으로 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과정이 제 작업실에서 이루어지고 주문받은 직물만 생산하니 자원 낭비도 없어요.” 환경보호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재학 당시 스텔라 매카트니 재단에서 후원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스텔라 매카트니가 패션계의 과잉생산과 낭비로 벌어지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어요. 그녀의 강의는 제게 큰 영향을 주었고, 프린트 직물 공장에 대해 확신을 갖게 했어요.”
브랜드가 점점 더 성장하고 있는데 파리나 뉴욕에서 활동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리처드 퀸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런던에서만 활동할 계획입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영국패션협회에서 후원도 많이 받았죠. 브랜드를 키우는 것이 목표라면 이곳에서도 직원을 고용하고 교육할 수 있어요. 지역 자원을 활용하고 훈련된 인재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고요. 다른 곳으로 옮기기보다는 사람들을 런던으로 다시 불러 모으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