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MAIRE
바야흐로 실용주의의 시대다. 심미적인 부분에 두었던 가치를 편하고, 폭넓게 활용 가능한 것으로 옮겨왔다는 뜻이다. 영원히 아방가르드할 것 같던 하이패션계도 시대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몇 시즌째 아찔한 스틸레토 힐보다 납작한 굽의 샌들이, 인형 옷처럼 몸을 꽉 죄던 드레스 대신 낙낙한 팬츠가 런웨이를 메우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슬링(sling) 트렌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보디콘셔스 실루엣의 불편함과 오버사이즈 실루엣의 거추장스러움, 둘 중 어느 쪽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완벽한 대안을 제시하며 단숨에 대체 불가능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골반에 살짝 걸쳐 입은 팬츠, 제 사이즈보다 약간 큰 느낌의 코트, 발목 부분을 묶어 헐렁한 실루엣을 강조한 팬츠처럼 긴장감과 여유 사이를 오가는 디테일이 극과 극의 실루엣 사이에서 유독 쿨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 SALVATORE FERRAGAMO
- JW ANDERSON
- JW ANDERSON
- LOEWE
사실 슬링은 설명하기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다. 슬링 백이야 이미 몇 시즌째 유행하며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지만, 옷은 ‘도대체 느슨하다는 게 어느 정도야?’라는 의문을 품게 만드니 말이다. 먼저 슬링을 하이패션계로 불러들인 보테가 베네타와 JW 앤더슨의 쇼를 예로 들어보자. 보테가 베네타는 소매길이 와 전체 길이 모두 기본적인 테일러드 코트보다 살짝 긴 코트를 선보였고, 허리 벨트까지 헐렁하게 묶으며 슬링한 스타일링을 완성했다. 반면 JW 앤더슨은 바지 밑단을 살짝 묶어 대비를 이루게 함으로써 다른 부분의 낙낙한 형태를 강조했다. 광택이 돋 보이는 로샤스의 팬츠와 랑방의 구조적인 데님 팬츠, 넉넉하다 못해 남의 바지를 빌려 입은 듯 보이는 사카이의 와이드 팬츠처럼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디자인으로 슬링을 구현한 브랜드도 적지 않다.
- SAC AI
- BOTTEGA VENETA
- LANVIN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다. 달리 해석하자면 급박하게 돌아가는 패션계에 낯선 것이 끼어들 틈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하다. 그렇기에 이름마저 생소한 슬링의 등장 역시 아직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두고 보길.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고 모호하며 오묘한, 그러나 입을수록 편안하고 포근한 이 실루엣은 디자인만큼이나 분명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은 속도로 일상에 뿌리내릴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