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세상이 구태의연한 규율과 진부한 잣대를 기준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패션계가 ‘자유와 환상의 나라’로 불리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어딘가에서는 금과옥조로 삼는 성별이나 국적, 인종의 장벽이 패션 월드에서는 비교적 악영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흑인 모델을 의도적으로 런웨이에서 배제하거나 여성 모델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는 경우가 보도되긴 하지만, 적어도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이후에는 즉각적인 자정 노력을 보이기도 한다. 보편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이처럼 나름대로 진보적인 경향을 띠는 패션계가 거스르는 통상적인 규율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나이와 연차다. 32세에 디올 옴므의 수장이 된 에디 슬리먼이나 33세에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했던 톰 포드의 전설적인 일화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특히 어느 집단이든 철저하게 나이로 열 맞춘 수직 관계와 상하 관계를 따르며, 그 때문에 성공 역시 나이와 어느 정도 비례관계를 보이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이는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패션계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현재까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패션 하우스는 이러한 파격적 인사이동(?)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한 이익을 얻는다. 넘치는 패기와 동시대적 감각으로 브랜드의 운명을 단숨에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서는 깊을지라도 침체기를 겪었거나, 이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브랜드라면 신선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영입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최근에도 유수의 하우스 브랜드가 젊은 수장을 택하며 세대교체를 감행했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디젤은 2018년 협업 캡슐 컬렉션을 선보이며 연을 맺었던 와이 프로젝트(Y/Project)의 글렌 마틴(Glenn Martens)을, 블루마린은 29세의 디자이너 니콜라 브로그나노(Nicola Brognano)를 각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하며 마이너 패션 신에서 인재를 영입하는 과감한 발상을 보여줬다. 마틴은 감각적인 디자인의 대가로 알려진 만큼 오랫동안 부진했던 디젤을 소생시킬 구원투수로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중이며, 브로그나노는 지난 2021 S/S 시즌의 첫 정규 컬렉션을 인기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와 협업해 완성하며 잊혀가던 블루마린이라는 이름을 패션계의 중심으로 불러오는 데 성공했다. 지방시 역시 스트리트 패션으로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했지만, 주류 패션계에서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던 1017 알릭스 9SM(1017 Alyx 9SM)의 매튜 M. 윌리엄스와 손잡았다. 34세의 이 젊은 디자이너는 지방시가 꿈꾸는 여성상과 남성상을 결합하는 ‘자물쇠’라는 요소를 중심으로 새 컬렉션을 꾸렸으며, 수년간 클레어 웨이트 켈러가 이룩한 우아한 지방시의 세계를 단숨에 힙하게 바꿔놓았다.
반면 에밀리오 푸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바꾸는 대신 캡슐 컬렉션을 지속적으로 론칭하며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그 첫걸음은 사랑스러운 디자인으로 주목받는 33세의 일본인 디자이너 토모 코이즈미와 함께한 프로젝트로, 그는 에밀리오 푸치의 환상적인 색감을 적극 활용하며 고루하다고 여겨지던 브랜드의 이미지를 어리고 신선한 느낌으로 바꾸는 데 큰 몫을 해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화제를 낳은 건 역시 라프 시몬스와 프라다의 만남이다. 지난 4월 프라다에 합류했지만 철저하게 감춰져 있던 라프 시몬스의 디자인은 2021 S/S 컬렉션에서 베일을 벗었다. 브랜드가 지닌 클래식하면서도 스포티한 정체성을 모두 지켜내되, 자신만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더한 컬렉션은 찬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52세로 앞서 언급한 디자이너들에 비하면 이미 연차가 쌓일 대로 쌓인 베테랑이지만, 캘빈 클라인 205W39NYC에서 아메리칸 유스 컬처의 정수를 보여준 그이기에 프라다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물론 새로움이 연륜과 경험에서 비롯된 실력을 무조건 뛰어넘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34세의 나이에 보테가 베네타를 이끌게 된 다니엘 리나 36세의 나이에 7년째 로에베를 책임지고 있는 조나단 앤더슨의 사례를 보며 이미 학습했듯, 수십 년간 살아남은 브랜드의 저력과 브랜드에 대한 애정과 이해도가 높은 기존 구성원, 여기에 브랜드의 스타일을 고유의 감각으로 재해석할 줄 아는 영민함이 더해지면 유효하고 긍정적인 결과가 도출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앞으로 지켜보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디젤과 블루마린, 에밀리오 푸치가 거리에서 회자되고, 고상한 분위기가 넘쳐흐르던 지방시와 프라다가 ‘힙스터’ 스타일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게 바로 변화무쌍하고 자유분방한 패션이라는 세계의 진정한 묘미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