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팬데믹으로 한동안 미뤄졌던 멧 갈라(Met Gala)가 2년 만에 다시 열리며 패션계와 언론은 화려한 포토월을 오랜만에 눈앞에서 마주했다. 셀럽 호스트로 선정된 티모시 샬라메를 비롯해 조 크라비츠, 켄달 제너, 헌터 샤퍼 그리고 리한나와 에이셉 라키, 퍼렐 윌리엄스와 헬렌 윌리엄스까지 수많은 디자이너와 셀러브리티들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기상천외한 의상으로 레드카펫을 장식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플래시 세례를 받은 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발렌시아가의 블랙 복면과 가운을 입고 노출은커녕 얼굴까지 꽁꽁 감싸고 자발적인 페이스 오프를 감행한(!) 킴 카다시안. 그녀와 함께 등장한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 역시 그 복면 대열에 합류했다(<가십걸 리부트>로 화려하게 데뷔한 모델 겸 배우 에반 모크 역시 페이턴트 레더 복면을 한 채 톰 브라운 수트를 입고 등장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오랜만에 열린 레드카펫 행사, 그것도 누구보다 ‘튀어야 사는’ 패션계의 최대 이벤트인 멧 갈라에서 킴 카다시안은 노출 하나 없는 비밀스러운 복면 드레스로 오히려 큰 화제를 낳으며 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실 그녀의 복면 패션은 멧 갈라를 위해 도착한 순간부터 이어졌다. 지퍼와 피어싱이 달린 레더 마스크와 레더 코트 그리고 아찔한 포인티드 토 레더 부츠를 신고 전신을 철저히 가린 레더 룩이자 완벽한 페티시 룩(레드카펫 룩과 상통하는!)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증한 것. 그녀가 보여준 일련의 룩은 페티시즘이 패션계의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 트렌드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한편, 패션계에 도달한 성적인 판타지와 에로틱 페티시를 논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은 단연 팝 스타 마돈나다. 그녀의 몸을 휘감은 가죽 하네스, 보디 체인, 콘브라, 몸을 옥죄는 코르셋, 피시넷 타이츠 등 S&M 패션의 상징들은 전설적인 페티시 룩을 만들어냈고, 그녀만의 섹슈얼리티와 관능의 세계를 각인해왔다. 얼마 전 2021 VMA 어워드에서도 마돈나는 클래식한 트렌치코트 속에 레더 코르셋 수트를 입은 채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페티시 코드를 향한 열정을 다시금 증명하며 킴 카다시안이 일으킨 페티시 열기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에로틱 페티시’에 대한 끌림은 사실 본능이나 다름없다. 아슬아슬하고 자극적인 환상에 대한 호기심과 욕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테니 말이다. 과거 컬렉션을 통해 수없이 양산된 다양한 페티시 룩에 대한 묘사 역시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며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우아한 재킷 위에 하네스를 더하거나 펜슬 스커트 사이로 무릎을 덮는 레이스업 부츠를 드러낸 채 란제리 룩을 응용하는 등 현실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한껏 순화한 룩으로 그 수위를 조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평범하던 일상이 달라지고 온갖 규제로 자유가 억압당하면서 젠더리스 신드롬은 물론 에로틱 페티시를 통해 새로운 판타지에 빠지려는 이들의 욕구는 새 시즌 페티시즘의 귀환에 불을 지폈다. 그것도 더욱 자극적이고 강렬한 형태로 말이다. 매혹적인 페티시의 미감에 다시 초점을 맞춘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100주년을 맞아 공개한 ‘아리아’ 컬렉션의 주제로 파격이고 농염한 자극을 주는 ‘에로스(Eros)’를 꺼내 들었다. 초커와 연결한 하네스, 몸에 꼭 끼는 가죽옷, 레이스 코르셋 그리고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나올 법한 S&M 도구들이 곳곳에서 포착됐는데, 캠페인에는 이탈리아의 4인조 록 밴드 마네스킨(Maneskin)이 젠더리스 코드의 아리아 컬렉션을 입고 도발적이고도 압도적인 페티시 미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리처드 퀸은 또 어떤가. 특유의 글래머러스하고 볼드한 플로럴 프린트로 도배한 사랑스러운 발레리나 드레스나 이브닝가운들과 지극히 상반되는 라텍스 소재의 발라클라바, 사이하이 부츠, 초커 체인, 하네스 등으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환상을 그려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요소는 구찌와 리처드 퀸은 물론 지난 생 로랑의 2020 F/W 시즌 런웨이에서 주를 이룬 소재인 라텍스다. 페티시 룩의 단골 소재로 여전히 디자이너들이 가장 주목하는 소재인 라텍스는 몸을 따라 흐르는 광택은 물론 보디 콘셔스 실루엣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는 몸의 곡선이 자아내는 관능미로 그 어떤 노출 없이도 보는 이들의 페티시를 자극한다. 킴 카다시안이 보여준 스판덱스 소재의 발렌시아가 마스크와 보디 드레스에서 느껴지는 페티시를 떠올려보라. 섹슈얼리티를 은근히 뿜어내고 싶은 이들이 라텍스 부츠나 드레스를 선택하는 등, 이 소재를 적극 활용해 S&M이 떠오르는 가학적인 도구들을 내세운 페티시 룩이 아니라 센슈얼하면서 과하지 않은 관능미를 표현할 수 있는 영민한 페티시 웨어를 즐기며 젊은 세대에게도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통제된 일상 속에서 억눌린 자유와 욕구를 발산하고자 다시 뜨겁게 피어오른 페티시에 대한 호기심. 눈앞의 현실에 대한 반감과 대리만족으로 파생된 자발적인 결박과 구속을 표현하는 현상일지라도 늘 존재하던 페티시가 아닌 새로운 시도로 재해석된 페티시 웨어들은 팬데믹으로 한껏 침체되고 제한된 패션계의 범주를 확장했다. 이 같은 흥미로운 자극들이 주는 결과물을 탐닉할 수 있으니 페티시에 대한 부담을 덜고 보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