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榮華)롭다’라는 표현이 있다. 사전적으로 ‘몸이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빛날 만하다’라는 의미다. 지난 2년간 한국 문화는 숨 고를 틈 없이 영화로운 순간을 맞이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 작품상을 비롯해 2백여 개의 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배우 윤여정이 같은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으며 그룹 BTS는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의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어디 그뿐인가.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았고, 해당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은 순식간에 글로벌 스타가 됐다. 한국에 대해 아는 사실이 있는지, 아니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고는 있는지 구구절절 묻고 설명하던 시절이 일순간 과거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하이패션계도 이 거대한 흐름을 발 빠르게 수용했다. 가장 괄목할 만한 이벤트는 얼마 전 진행한 샤넬 2021-22 공방 컬렉션이다. 여느 때처럼 런웨이에 나타난 모델 수주는 캣워크를 지나 무대 뒤로 향했고, 곧 마이크를 잡은 채 노래를 시작했다. ‘하얀 물결 위에 빨갛게 비추는 햇님의 나라로 우리 가고 있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1973년 발매된 곡을 리메이크한 것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말 가사로 이뤄져 있다. 패션의 중심지 파리, 그중에서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빅 쇼에서 요즘 스타일도 아닌 한국 노래가 울려 퍼진 건 매우 이례적이며 유의미한 일이다. 사실 샤넬이 한국에 관심을 보인 건 처음이 아니다. 작고한 칼 라거펠트는 공공연하게 한국과 한글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고, 한복의 아름다움을 다룬 샤넬 크루즈 서울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모델에게 가체를 씌우는 등 대담한 시도가 돋보인 이 쇼는 하이패션과 한국을 잇고, 나아가 한국이 아시아의 주요 패션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구찌도 지난여름 우리나라 전통 가옥에서 영감 받은 국내 두 번째 단독 매장을 열고 색동 모티프의 신제품을 선보인 데 이어 지난달에는 강원도 평창을 주제로 한 평창 캡슐 컬렉션을 론칭하며 변함 없는 ‘한국 사랑’을 증명했다. 해당 컬렉션은 마지막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평창의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해 제작했으며, 도시명이 쓰인 가죽 태그나 밑창 등의 디테일로 그 의미를 강조했다. 며칠 전 공개한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캠페인 이미지에도 한국이 등장한다. 사진작가 프랑수아 프로스트(François Prost)가 촬영한 ‘시티 시리즈’는 지하철을 타고 전 세계 22개 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는데, 그 가운데 서울과 부산이 포함돼 반가움을 더한다. 지난해 다양한 언어로 브랜드명을 표기해 화제를 모았던 ‘랭귀지’ 컬렉션에도 한글을 중점적으로 활용한 점을 상기하면, 브랜드가 한국을 중요한 국가로 여기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이런 사례는 아주 단편적이다. 한국 문화가 하이패션 신의 주된 영감처로 거듭나고, 한국어가 모두에게 익숙해지는 데는 긴 시간과 각별한 공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의 이러한 행보는 우리나라를 둘러싼 무수히 많은 시선과 태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만연한 인종차별을 딛고 해외에서 입지를 쌓아온 한국 모델들, 패션의 불모지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활동하며 우리 문화를 알린 국내 디자이너들, 또 이 작은 나라의 독특한 매력을 미리 알아차린 선구적 안목을 지닌 해외 디자이너들의 관심과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음을 명징하게 알린다. 그러니 섣부르나마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19세기 중반 자포니즘이 유럽 일대를 풍미했듯 코리안 컬처가 패션계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머지않은 날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