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초 단위의 세상에 산다. 어제의 진일보는 오늘의 퇴보가, 오늘의 뜨거움은 내일의 미지근함이 된다. 낡은 것들에 남은 선택지는 폐기 딱지가 붙은 채 버려지는 결말뿐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평범하고 잔인한 이치가 패션 세계에서는 때로 무력해진다는 사실이다. ‘지구상에서 제일 변덕스러운 분야 주제에?’라고 반문해도 할 말이 없다. 이건 아이러니가 맞다.

어쨌거나 한물간 것들을 대하는 패션 세계의 태도는 이렇다. 1 일단 유행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소비한다. 국적, 성별, 나이, 인종을 불문하고 모두가 동시에. 2 유행에서 완전히 멀어진 트렌드와 브랜드는 소각장 대신 올드패션드(oldfashioned)라는 이름의 창고로 보낸다. 올드패션드는 ‘올드한’ 패션드이긴 하나, 패션드는 패션드다. 고로 언제든 회생할 여지가 있다. 3-1 창고에서 꺼내줄 구원자를 찾거나 3-2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차례가 돌아오리라 믿으면서.

 

 

3-1에 관한 예는 피비 필로알레산드로 미켈레, 다니엘 리가 각각 셀린느구찌보테가 베네타를 소생시킨 일련의 사례를 통해 되짚어볼 수 있다. 이 사건(?)을 발판 삼아 여러 하우스 브랜드는 일제히 젊은 인재 찾기에 나섰고, 결국 블루마린니콜라 브로그나노를, 니나 리치루시미 보터와 리시 헤레브르를, 디젤 글렌 마틴스를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저마다의 감각으로 세기말 패션의 대명사이던 블루마린을 Y2K 패션의 선두 주자로 승격시키고, 고루했던 니나 리치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쇄신했으며, 철 지난 브랜드의 대표 격이던 디젤을 힙의 궤도에 올려놓았다. 2022 S/S 밀라노 패션위크에서도 이와 비슷한 서사가 목격된다. 지난해 트루사르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게엠베하(GmbH)의 디자이너 듀오 벤자민 허스비(Benjamin Huseby) 세르핫 이식(Serhat ISik)이 유례없는 데뷔 쇼를 펼쳐 브랜드의 위상을 바꿔놓은 것이다. 싸구려 향수와 홈 웨어, 심지어 홈쇼핑 의류에까지 라이선스를 팔아넘기며 몰락의 길을 걷던 1백11년 역사의 하우스는 오로지 듀오의 실력에 편승해 ‘쫄딱 망한’에서 ‘주요한’으로 수식어를 갈아 치웠다.

 

 

3-2의 경우 혁신을 꾀하는 대신 시대의 흐름과 브랜드의 DNA가 맞물리는 찰나를 영민하게 포착한다. 특히 최근 몇 시즌은 Y2K라는 거대한 트렌드 덕분에 추억 속으로 사장됐던 많은 브랜드가 생명력을 되찾았다. 뒷주머니의 독특한 스티치 장식으로 인기를 끌었던 트루릴리젼, 패리스 힐튼과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1990년대 할리우드 스타들의 파파라치 룩으로 열풍을 일으킨 쥬시 꾸띄르, 일본 문화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던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대표적이다. 당시로서는 꽤 비싼 가격 때문에 입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이 브랜드의 아이템은 오늘날 패션 인사이더의 전유물로 회생했다. 여세를 몰아, 스톰, 에스프리도 ‘그 시절 캐주얼’을 표방하며 리론칭을 감행했다. 기존의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 시절을 궁금해하는 청소년들을 타깃으로 삼았는데,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걸 보면 판매 전략이 꽤 성공적인 모양이다.

 

오래됨의 가치가 신파로 전락한 시대다. 이런 때 ‘지구상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분야’가 낡은 것을 대하는 방식은 무척이나 흥미롭고 역설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패션을 사치재로, 또 다른 누군가는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환상쯤으로 정의 내린다. 그러나 패션은 종종 시대, 사회, 성, 환경 등의 주제와 유기적으로 얽히며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뜻이야 좋을 대로 매기면 그만이지만, 느껴본 사람만 아는 패션의 진짜 묘미는 여기에 있다. 우리 삶의 면면과 맞닿은 이야기를 던짐에. 그리하여 우리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듦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