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개봉한 영화 <금발이 너무해>는 주인공 ‘엘 우즈’(리즈 위더스푼)가 연인에게 갑작스럽게 이별 통보를 받으며 시작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엘이 지나치게 금발(too blonde)이기 때문. ‘예쁘기만 하고 지적이지 않은’ 엘의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해 영화는 전반부 내내 두 가지 시각적 장치를 활용한다. 앞서 언급한 금발, 그리고 핑크로 함축한 ‘바비코어(Barbiecore)’ 코드다.
몇 세기 전까지 부유함과 고급스러움을 대표하던 핑크는 시대를 거듭하고 바비코어와 결합하며 온갖 불명예를 떠안게 됐다. 대표적으로 1955년 작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서 마릴린 먼로가 무지하고 돈만 좇는 인물 ‘로렐라이’를 표현할 의도로 핫핑크 컬러의 새틴 드레스를 택한 장면이나, 똑똑하고 착한 주인공 ‘케이디’(린제이 로한)를 괴롭히는 3명의 학생 무리를 핑크색 옷으로 스타일링한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포스터는 핑크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이용하고 고착화한 예다. 여기에 화이트 워싱(유색인종을 백인의 외모로 표현하는 행위) 사건과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마텔사의 바비 컬렉션이 심벌 컬러로 핑크를 채택한 탓에 핑크는 대중에게 의심의 여지 없는 바비의 색-다시 말해 지적이지 못한 색으로 인지되기에 이른다. 심지어 성적 지향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나, 미국의 유명 TV 시리즈 <심슨 가족>에는 호머 심슨이 핑크색 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풍자적 에피소드가 등장할 정도이니, 이 정도면 핑크는 지구상에서 가장 서러운 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새옹지마라 했던가. 이 같은 현상의 반대급부로 몇 해 전부터 핑크를 긍정하는 움직임이 대대적으로 일었다. 일례로 2018년에는 핑크의 고정관념을 타파하자는 뜻을 모으기 위해 <핑크: 펑크, 아름다움, 강렬한 색의 역사(Pink: The History of a Punk, Pretty, Powerful Color)> 전시가 열렸고, 같은 해 다양한 이야기 속 여성 서사를 비틀고 문제를 제기하는 아티스트 로이스 코헌(Lois Cohen)의 작품이 큰 인기를 얻었다. 이어 여성들의 행진(Women’s March)은 핑크를 여성 연대와 강인함의 상징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2023년에 개봉할 예정인 마고 로비 주연의 영화 <바비(Barbie)>는 남녀 임금 차별, 여성 혐오 범죄 등을 다룸으로써 핑크에 악영향을 미쳤던 역사를 속죄할 예정이다. 해당 영화는 2022년 개봉한 영화 <작은 아씨들>에 여성주의적 어조를 지극히 우아한 방식으로 녹여낸 감독 그레타 거윅이 진두지휘해 더욱 기대를 모은다.
사회적 메시지를 수용하는 일에 유독 적극적인 패션계도 시대 흐름에 발맞추는 중이다. 이번 시즌 발망은 바비와 협업해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핑크-바비코어 피스를 선보였다. 모든 제품을 유니섹스로 제작했는데, 이는 성차별에 반대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리비에 루스탱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공개된 캠페인 이미지 속에는 여전히 수동적 포즈를 취하는 모델이 등장하고, 여체를 관능적으로 해석한 디자인이 주를 이뤄 과거를 답습했다는 혹평을 받았으나, 바비라는 코드를 젠더리스적으로 풀어내려는 노력만큼은 유의미해 보인다. 같은 시즌 발렌티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엘파올로 피리 역시 ‘PINK PP’ 컬렉션을 통해 핑크로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지평을 열며 핑크에 탐닉했다. 모든 룩과 액세서리를 오로지 핑크 컬러만으로 구성한 이 컬렉션은 관객으로 하여금 핑크의 본질에 주목하고, 어떤 이미지도 덧입지 않은 순수한 색으로서 핑크를 조명하게 만든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여러 오해와 비난, 이간 속에 놓인다. 마치 핑크가 그러하듯. 그러나 그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인간들과 달리 핑크가 나아가는 태도는 지극히 정공하다. 담담한 자세로 편견을 부수고 네거티브를 전복하며 수동을 능동으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니 말이다. 여전히 핑크를 통해 여성을 대상화 하거나, 그 위에 덧입혀진 또 하나의 여성주의적 의미를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브랜드가 즐비하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21세기에 바비라는 구시대의 유물을, 온갖 부정적인 시선으로 점철된 핑크라는 세계를 맞닥뜨린 건 색이나 스타일, 말, 그 외 모든 형식의 굴레를 벗는 과정을 배우기 위함은 아닐까. 태어나기 전부터 블루와 핑크로 구분 지어지는 성 고정관념의 늪에서, 그리하여 평생 동안 ‘핑크’로 인식될 숙명 안에서 이 색은 어쩌면 우리의 삶을 은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