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와의 길고 긴 사투 끝에 포스트팬데믹 시대가 도래했다. 온라인으로만 연결된 세상에 모두가 지쳐 있던 시점에 하나둘 문을 열고 오프라인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 이러한 움직임은 패션계 역시 마찬가지다. 직전 시즌만 해도 많은 디자이너가 코로나19의 전염성을 염두에 두고 이벤트를 진행하지 않거나 디지털로 쇼를 공개하는 등 바이러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고 소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아픔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낙관하는 마음이 통한 것일까. 2023 F/W 런웨이는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무대의 연속이었다.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은 디자이너들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 세상을 향해, 관객을 향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패션으로 풀어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때의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다. 아직도 전쟁 중인 상황에서 디자이너들은 이 비현실적 사태에 주저 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전쟁 발발로 프라다 컬렉션이 취소될 위기에 처할 뻔한 사실을 잊지 않고 전쟁이 1년째 이어지고 있음을 일깨우는 패션쇼를 열었다. “아름다움이나 화려함만을 추구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 속 가치를 조명했어요.”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번 컬렉션의 의미를 밝히며 런웨이에서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표현했다. 프라다가 간호복, 군복 등 일상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의 유니폼을 변형해 아름다움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관심과 사랑을 표현했다면, 에스터 마나스(Ester Manas)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여성의 신체적 특징이나 사이즈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었다. 사실 파리 패션위크는 보디 포지티브 운동에 여전히 보수적 태도로 일관하며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깡마른 모델을 고수해왔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스터 마나스는 “나의 모든 옷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행태를 비난하는 대신 포용성을 내세웠고 런웨이에 다양한 사이즈의 모델을 세워 풍성하고 아름답게 장식했다. 사회적 인식이 변한 덕분일까. 유독 모델에 엄격하던 샤넬이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2021 F/W 시즌부터 다양한 체형의 모델을 기용하더니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에도 인종과 사이즈가 다양한 모델을 캐스팅해 신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에 힘을 보탰다. 누구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수년간 패션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포용성에 관해 디자이너들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중 하나가 바로 틀에 박힌 성(性)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이다. 이들의 부단한 노력이 통했는지 성 중립을 의미하는 젠더 뉴트럴(gender-neutral) 개념이 사회적 의식으로 급부상했으며, 남성 셀럽들도 젠더리스 패션을 표방하는 의미로 스커트를 입고 쇼에 참석했다. 톰 브라운 쇼장을 찾은 에릭 남은 치마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SNS에 올리며 ‘스커트의 시대가 시작된다’라는 말을 남겨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였다. 보는 시선에 따라 대상이 변하는 시각에 초점을 맞춰 컬렉션을 공개한 미우미우 역시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깨며 누구나 입고 싶은 젠더리스 룩을 디자인했다. 간결하면서도 성에 따른 제약을 두지 않은 미우치아 프라다의 명민한 감각에 감탄이 절로 나온 순간.
이 외에 신선한 자극을 안기며 탄성을 자아낸 또 하나의 쇼가 있으니 바로 지난 시즌 최고 화제의 주인공 코페르니. 특수 섬유를 사용해 현장에서 드레스를 만든 퍼포먼스에 이어 2023 F/W 시즌에는 패션과 기술, 로봇과 인간이 함께하는 쇼를 공개한 것. 우화 작가 장 드 라퐁텐의 <늑대와 어린 양>에서 영감 받아 꾸민 무대는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평화로운 상생이 가능하다는 걸 시사했다. 첨단 기술과 패션의 접목으로 디자이너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거창한 의미가 아닌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의미를 담았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인간과 로봇의 공생을 외치는 코페르니부터 지구의 경이로움, 자연의 다양한 형태와 색을 표현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퍼포먼스로 보여준 언리얼에이지(Anrealage)까지. 결국 인간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랑으로 모든 생명과 조화롭게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실 인간은 수백 년 전, 아니 현재까지 동물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동물 학대를 공공연하게 자행하며 자연을 개인의 소유물인 양 낭비하고 파괴해왔다. 이에 스텔라 매카트니와 콜리나 스트라다(Collina Strada)는 지속 가능성과 동물 보호의 중요성,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토로하며 경각심을 일깨우는 퍼포먼스를 공개했다. 각종 사회문제를 위트 있는 디자인으로 풀어내며 지속 가능한 패션을 전개하는 콜리나 스트라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힐러리 테이무어(Hillary Taymour)는 ‘제발 내 친구들을 먹지 마세요(Please don’t eat my friends)’라는 강렬한 테마로 뉴욕 패션위크를 장악했다. 다양한 동물 분장을 한 채 런웨이를 누비는 모델들은 얼굴에 돼지 코나 새부리 모형을 쓰고 등장하는가 하면, 동물의 꼬리를 달고 존재감을 뽐냈다. 다양성과 환경문제, 흑인 인권 등에 앞장서는 그가 이번에는 동물을 향한 존중과 사랑, 그리고 공존을 표현한 것. 지속 가능성의 선두 주자 스텔라 매카트니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승마 학교인 마네주 드 레콜 밀리테르에서 쇼를 열었다. 그리고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의 영감의 원천이자 2023 F/W 컬렉션 테마인 야생말들이 홀스 위스퍼 장 프랑수아 피뇽(Jean François Pignon)과 함께 쇼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델이 런웨이를 걷는 동안 말들은 캔터링을 하고 흙에서 구르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친환경 소재가 92%에 달하는 룩은 동물과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는 스텔라 매카트니의 마음을 대변했다. “여러분은 겨울옷을 입기 위해 아무것도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조화로운 관계가 가능하다고 믿는 그는 친환경적 방식으로 얼마든지 패션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서사적으로 풀어낸 컬렉션으로 이를 증명했다.
오늘날 하이패션은 허영심을 채워주는 사치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패션계는 누구보다 현실 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세상의 흐름에 맞춰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데 앞장선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희망을 얘기하고, 인권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환경과 동물 보호에 누구보다 진심으로 공감한다. 물론 패션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직접적인 열쇠는 아니지만, 분명한 건 패션계가 다양성을 지향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