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을 기꺼이 온몸으로 맞이하며. 배우 고윤정이 샤넬과 함께한 첫 장면들.

샤넬의 앰배서더로서 촬영하는 첫 지면 화보예요. 샤넬의 새로운 얼굴이 되어 함께하는 만큼 소속감과 책임감을 느꼈어요. 오늘 입은 샤넬 2023/24 공방 컬렉션은 영국의 음악 문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평소보다 자유롭고 대담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지난 5월 마르세유에서 열린 샤넬 2024/25 크루즈 쇼에도 참석했죠. 제 인생의 첫 패션쇼였어요!(웃음) 역사적인 건축물인 ‘시테 라디외즈’를 배경으로 컬렉션이 펼쳐졌는데, 분위기가 예상보다 훨씬 밝더라고요. 한자리에 모인 샤넬 앰배서더들과 함께 웃으면서 쇼를 즐겼어요. 시각적으로 큰 자극을 준 장면들이었죠.

쇼장을 벗어나 마르세유 곳곳에서 보낸 시간은 어땠어요? 마르세유에 머문 사흘 내내 부슬비가 내리다가 제가 떠날 때쯤 날씨가 화창해졌어요. 아쉬웠는데, 원래 그 동네에 비가 잘 오지 않는대요. ‘이곳의 비 오는 풍경을 볼 수 있다니, 완전 러키잖아!’ 싶었죠.(웃음) 마르세유의 바다를 가까이에 두고 틈틈이 바라볼 수 있어 좋았어요. 일이 목적이지만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여행은 일상을 환기하는 시간이기도 하죠. 낯선 곳에서 맞은 순간들이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요. 맞아요. 삶의 터전을 조금만 벗어나도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요. 여행은 이토록 넓은 세상에서 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걸 실감하고,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 너른 마음을 갖게 해요. 시야가 확장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연기할 때도 더 풍부하고 담대하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배우는 작품마다 새로운 캐릭터를 표현하잖아요. 캐릭터와 처음 만날 때 주로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제게는 모두 매력적인 캐릭터이니 깊은 애정을 느껴요. 다만 아직은 제 본성과 거리가 먼 캐릭터를 만나면 걱정이 앞서요. 예를 들어 <무빙>의 ‘희수’는 저와 딱 들어맞았는데, <환혼: 빛과 그림자>의 ‘부연’은 그렇지 않아 신경이 더 쓰였어요. 제 성격이 부연만큼 사랑스럽진 않다고 느꼈거든요. 어떻게 해야 저만의 표현으로 부연을 가장 빛내줄 수 있을지 연구를 많이 했어요. 대본을 입체적으로 살피면서 그의 말과 행동을 스스로 납득하는 과정을 거쳤죠.

본인과 거리가 먼 캐릭터를 납득해가다 보면, 일상에서도 타인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듯한데 어떤가요? 그렇죠.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존재는 한 명도 없으니 누군가의 행동이 저로서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지’ 하는 편이에요. 타인을 미워하는 건 결국 내 마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다 보면, 저와 잘 맞지 않는 부분마저 사랑스럽게 여겨지기도 하더라고요.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이 마음으로 이해되는 신기한 경험을 종종 해요.

미움보다 사랑에 에너지를 쓰는 사람의 말로 들리네요. 얼마 전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넌 얼기설기 얽혀 있는 채반 같아. 그게 네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해.” 만약 저라는 채반이 촘촘했다면, 타인을 더 섬세히 헤아리며 깊이 공감할 수 있겠죠. 그런데 한편으론 구멍이 크기 때문에 무던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이 장점이 현장에서도 발현되게 해보려고요.

본인의 성정 중 연기할 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면요? 관찰력이 좋아요. 미술을 전공할 때 어떤 사물을 아주 예쁘게 그리진 못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정밀하게 묘사해낼 자신은 있었거든요. 그런 점이 연기에도 도움이 되더라고요. 제가 맡은 캐릭터와 닮은 사람을 자세히 살핀 뒤 그의 특징을 연기에 녹여내는 식으로요.

그 덕분인지 고윤정 배우가 표현한 캐릭터 라인업이 다채로워요. 장르와 시대를 넘나들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왔죠. 돌아보니 꽤 다양한 캐릭터를 만났더라고요. 자연스레 새로운 연기에 대한 갈증이 생겼어요. 캐릭터 사이의 간극이 크면 오히려 표현하기 수월하기도 해요. 만약 예전에 연기한 역할과 같은 직업군의 인물을 맡는다면 둘의 차별점을 직접 만들어가야 하니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럴 수 있겠네요. 한 명의 배우가 비슷한 캐릭터를 또 연기하면 표현 방식이 유사해지기도 쉬울 것 같아요. 이 지점을 어떻게 풀어가려고 하나요? 제가 작품 속 세계의 인물이란 믿음을 굳게 품은 채 몰입하려고 해요. 그래야 시청자에게도 그 인물로서 다가갈 수 있는 것 같거든요. 배우 본인이 먼저 확신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작품과 작품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궁금해요. 전작의 여운을 잘 떠나보내는 편인가요? 물론 애정을 쏟은 작품과의 이별이 쉽진 않죠. 여운을 충분히 느끼는 것도 좋지만, 그 감정이 지속되면 힘들 것 같아요. 한 동료 배우가 한 말이 떠올라요. “사랑을 사랑으로 잊듯이, 작품도 작품으로 잊어야 하잖아. 너희를 한동안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할 것 같아.” 제게도 전작의 기억들이 어느 날 문득 몽글몽글 떠오를 때가 있어요.

소중한 그 추억들을 어떻게 간직하고 있어요? 매니저님이 보내준 모니터 영상 중 제가 아끼는 장면을 휴대폰에 저장해둬요. 모니터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 “오케이, 컷!”을 외치는 감독님의 목소리 등이 그대로 담겨 있거든요. 작품마다 모습이 바뀌는 저를 보면 ‘열심히 살아왔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해요.(웃음)

데뷔 후 5년의 시간이 흐른 요즘은 현장으로 향하는 마음이 어떤가요? 여전히 긴장과 설렘이 공존해요. 데뷔 초반엔 긴장의 비중이 더 높았어요. 작품의 일부를 책임져야 하니 제 것만 챙기기에도 바빴죠. 그때가 안갯속처럼 뿌연 상태였다면, 지금은 눈앞이 조금 선명해졌어요. 경력이 쌓인 만큼 여유가 생겨 주변 환경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현장이 돌아가는 광경을 보면 흥미롭더라고요. 나이대가 비슷한 스태프들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요.(웃음) ‘이번 현장도 역시나 재미있을 거고, 고난을 넘어서는 즐거움이 있을 거야’ 하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져요.

얼마나 더 즐거워질까 하는 기대감도 있어요? 네.(웃음) 놀듯이 일한다는 게 제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이 즐거움만은 앞으로도 계속 잃지 않았으면 해요.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 못하나?’ 싶은 순간이 오면 두려움이 앞설 것 같아요.

“연기를 시작한 이후의 새로운 자극과 변화가 좋다”라는 말을 했죠. 새로움을 맞이할수록 본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스스로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선을 갖게 돼요. 저에 대해 냉철하게 평가하고, 반성하고, 수용할 수 있는 거죠. 이 과정을 통해 제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듯해요.

윤정 씨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어떤 점을 갖춰야 해요? 좋은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해요. 그래야 비로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자신을 아끼는 마음이 타인을 위한 존중과 배려를 만들고, 더 나아가 사랑받는 방법도 깨닫게 해준다고 생각해요.

배우 고윤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 사랑이 어떻게 와닿나요? 팬들이 하는 말 한마디의 무게감을 느껴요. “경찰복 입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을 연기하는 모습도 궁금해요”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으면 ‘할 일이 많이 남아있구나’ 싶어요. 이게 제가 배우로서 나아가는 동력이에요. 언젠가 편지에 적힌 역할을 실제로 맡는다면, 적어도 그 바람을 전한 한 분은 작품을 봐주실 테죠.

배우는 수요와 선택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기도 하잖아요. 불안하거나 조급한 마음이 생길 법도 한데, 고윤정 배우의 지난 인터뷰를 살펴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지나간 일을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당시의 나로서 최선을 다했다면 됐다’ 하며 스스로를 보듬어주는 편이죠. 이런 마음으로 또 다른 무언가를 보고 느끼다 보면, 어제보다 오늘의 제가 더 성장해 있을 거라고 믿어요. 매일을 알차고 즐겁게 보내면서 새로운 작품과 만날 내일을 기꺼이 맞이하고 싶어요.

앞으로의 날들도 기대할게요. 마지막으로 고윤정 배우가 가장 사랑하는 여름의 기억이 무엇인지 묻고 싶어요. 3년 전 여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의 시간을 <무빙> 촬영에 쏟았어요. 쉴 틈이 생기면 배우들과 숙소 앞 바닷가에서 불꽃놀이를 하며 놀았죠. 선선한 바람이 자주 불었는데, 촬영을 마친 홀가분한 마음이 더 시원하게 느껴졌어요. 그러다 다시 대본 리딩을 하고, 배고프면 ‘뭐 먹으러 갈까?’ 하면서 발걸음을 옮기고. 마치 여름방학 같은, 청춘을 닮은 기억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