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국기 색을 모티프로 한 뎀나 바잘리아의 발렌시아가 2022 F/W 컬렉션 피날레 룩.
조나단 앤더슨이 이끈 문화적 이니셔티브를 예찬하는 책, <크래프티드 월드: 조나단 앤더슨의 로에베>.
조나단 앤더슨이 이끈 문화적 이니셔티브를 예찬하는 책, <크래프티드 월드: 조나단 앤더슨의 로에베>.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디자인한 마지막 시즌, 2025 F/W 컬렉션의 피날레 룩과 인사 장면.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디자인한 마지막 시즌, 2025 F/W 컬렉션의 피날레 룩과 인사 장면.

조나단 앤더슨이 로에베를 떠났다. 2013년 부임 이후 약 12년 만의 일이다. 패션계에서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조나단은 임기 동안 셀 수 없이 무수한 업적을 쌓았다.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제정했고, 퍼즐 백을 비롯해 무궁한 디자인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우스에 ‘창의적 패션의 본진’이라는 영광의 수식어를 안겼다. 돌이켜보면 로에베와 조나단은 미학을 넘어 정신과 정체성을 공유한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아름다운 의미로 이 둘을 동일시했다. 둘의 하나 됨을 사랑했다. 모니터 너머 눈물짓는 사람들에게 조나단은 러브 레터를 썼다.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에 반드시 끝이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 챕터는 끝나지만, 로에베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라고. 거자불추 내자불거(去者不追 來者不拒). 맹자는 가는 이를 쫓지 말고 오는 이를 막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부임과 사임 소식이 반복되는 요즘의 패션계를 보고 있노라면 이 말에 반기를 들고 싶어진다. 조나단처럼 브랜드와 공유한 추억이 많은 인물일수록 더욱 그렇다. 지난 3월에는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베르사체를 떠난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도나텔라는 설립자이자 형제인 지아니 베르사체의 사망 이후 27년 동안 브랜드를 총괄했다. 이토록 긴 시간, 그는 자신의 대담한 스타일을 반영해 메두사 모티프, 바로크 패턴, 트리베카 컬렉션 등 패션계의 역사책에 지워지지 않을 키워드를 남겼다. 가차 없는 트렌드의 파도에도 닻을 깊이 내리고 하우스의 명맥을 이어가는 단어들 말이다. 도나텔라는 사임 이후 최고 브랜드 홍보 대사로서 브랜드를 돕고 있다. 그는 평소 조국 이탈리아 정부의 동성애 혐오 정책에 정면으로 반발하며, 2023년에는 이탈리아 국립패션협회(CNMI)가 주관하는 지속 가능한 패션 어워드에서 ‘형평성과 포용성을 위한 인도주의상’까지 받을 정도로 진실한 사회운동가의 면모를 보여왔다. 이런 그이기에 베르사체에서의 두 번째 챕터 역시 진심을 다해 해낼 것을 알지만, ‘베르사체 없는 베르사체의 디자인’을 아직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발렌시아가 르네상스’를 이룩한 뎀나 바잘리아도 10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구찌로 이적한다고 발표했다. 파격 이상의 충격을 주며 발렌시아가를 패션계의 중심으로 견인한 뎀나는 실험적 스타일로 브랜드 DNA를 해석해내며 입지를 굳혔다.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업적을 이뤘지만, 그와의 안녕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건 2022 F/W 컬렉션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였던 탓에 쇼를 취소하는 브랜드가 적지 않았던 상황. 그러나 조지아 난민 출신으로 우크라이나의 슬픔에 깊이 공감한 뎀나는 ‘항복’의 뉘앙스를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쇼를 강행했다. 피란길에 오른 듯 눈보라를 헤치며 걷는 인물들과 계속해서 등장한 우크라이나의 상징색은 그 어떤 문구보다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뛰어난 디자인 감각에 가려졌지만, 패션이 현실에서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던 그의 일관된 주장은 때때로 발렌시아가에 ‘힙’보다 위대한 진정성을 불어넣었다. 이제 그 진정성은 구찌에게 가 새로운 영예를 안길 준비를 한다. 그러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니콜라 제스키에르처럼, 언젠가 뎀나를 다루는 위인전이 쓰인다면 그 첫 장에는 반드시 발렌시아가에서 이룬 영토 확장에 관한 내용이 담길 것이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날을 ‘안녕’(중의적 의미로)하며 살아왔다. 이건 끝, 저건 시작 하며 이름 붙이기도 수천 번을 거듭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그렇게 표현할 일들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한 번 기록된 페이지는 휘발되지도, 삭제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남아 뒷장을 읽는 누군가가 다시 펼칠 날을 기다릴 뿐이다. 우리는 언제고 패션과 예술의 공생을 논하며 조나단의 로에베를 불러올 것이고, 이탤리언 럭셔리를 조명하는 화보를 찍기 위해 도나텔라가 지휘한 베르사체의 캠페인 컷을 레퍼런스로 삼을 것이며, 패션의 사회적 영향력을 간과하지 않기 위해 뎀나의 결심을 상기할 것이다. 그렇게 패션계는 쭉 안녕할 전망이다. 그러니 아쉬움은 접어두고 이런 노랫말을 흥얼거려본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