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드라마 <미지의 서울>이 뜨거운 반응 속에 막을 내렸습니다. 여러 인터뷰에서 작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낸 만큼, 작품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어떤지 먼저 묻고 싶어요.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가 떠올라요.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하잖아요. 너무 힘든 날,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대신 출근해주면 어떨까 하는.(웃음) ‘미지’와 ‘미래’가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주다가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가 각자가 처한 상황을 주체적으로 극복해나간다는 이야기가 참 따뜻하게 다가왔어요. 일인이역에 처음으로 도전해보는 거라 선택하기까지 고민이 많았고 예상대로 과정 역시 지난했지만, 그만큼 많은 분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작품인 듯해 서운함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보내줄 수 있었어요. 어떤 작품이든 떠나보낼 때 사소한 후회가 남을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는 후회가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여한 없이 연기했어요.
서로 다른 외형과 성격을 지닌 일란성쌍둥이, 그리고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장면까지 사실상 네 얼굴을 오간 셈이죠. 복잡다단한 배역을 해냈다는 성취감도 클 것 같습니다.
맞아요. 지금까지 해온 연기 방식과 완전히 다르게 접근해야 했거든요. 하루에도 미지와 미래를 수차례 오가야 했고, 특히 둘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제가 제 자신의 상대역을 연기하는 셈이니 자세나 시선까지 촘촘히 계산해야 했죠. 어떤 장비를 만들 때 뜨거운 쇠붙이를 수도 없이 두들기며 담금질하는 과정을 거치잖아요. 그런 것처럼 현장에서 그야말로 온몸으로 부딪혔고, 그 과정을 무사히 마친 것만으로도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껴요.
<미지의 서울>은 누구의 삶도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고, 직접 살아본 뒤에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죠. 미지와 미래로 살아보는 동안,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게 결국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기도 했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삶을 오가면서 느낀 건 멀리서 바라볼 땐 이해되지 않거나 부럽게만 보이던 타인의 삶이 막상 그 입장이 되어보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는 거예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그 경험 덕분에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이 넓어지고, 결국 자기 자신까지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는 게 작품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어요. 극 중 미지의 대사 중에 “나의 가장 큰 천적은 나라는 걸 남이 되어서야 알았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어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생각해주는 마음처럼 스스로에게도 조금은 더 너그러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심어준 작품이에요.
<미지의 서울>을 비롯해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조명가게>까지 최근 선택한 작품 모두 누구에게나 있는 결핍과 상처, 그리고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다뤘어요. 요즘 이런 이야기에 이끌린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요.
대단히 큰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변화인 것 같아요. 누구나 고민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소중한 존재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결국 제 일이란 게 봐주시는 분들 덕분에 의미가 생긴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에 오랫동안 병실에서 투병 생활을 하시던 한 팬이 제 드라마를 보고 웃을 수 있었고 다시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주신 적이 있어요. 팬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도리어 제가 더 큰 위로를 받고, 받은 만큼 작품으로 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져요.
배우 본연의 다정함 덕분에 작품 속 인물들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는 생각도 들어요. <조명가게>로 인연을 맺은 강풀 작가는 “박보영 배우가 지닌 따뜻함이 연기에도 드러난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결국에는 선함과 다정함이 이긴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어요. 가끔 제가 연기하는 인물을 두고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게 자신의 선함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 어딘가에는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지치고 힘든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잊지 말아야 할 가치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통해서도 그런 이야기를 더 자주 건네고 싶어요.
관객에게 건네는 위로만큼이나 연기하는 과정에서 얻는 위로도 클 거라 짐작해요. 최근 참여한 작품이 자신에게 남긴 변화가 있다면요?
예전에는 힘든 일이 생기면 그 감정에 깊이 빠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곤 했는데, 요즘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한결 수월해졌어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준비하면서 성모병원 간호사 선생님들께 들은 말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힘든 순간에 제삼자가 된 것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스스로를 바라보라는 조언이었는데, 실제로 해보니 감정을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그 덕분에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는 방법을 조금씩 알게 된 것 같아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재난의 한가운데를 주체적으로 헤쳐나가는 인물 ‘명화’를 연기한 이후, 필모그래피 전반에서 낯설고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죠. 대중에게 익숙하게 각인된 이미지를 넘어서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 안에 어떤 고민이 자리했을지도 궁금해요.
데뷔한 지 10년쯤 됐을 때부터 줄곧 고민해온 일이에요. 누구나 그렇듯 제 안에도 하나의 결로 설명되지 않는 다양한 모습이 있는데, 작품에서는 늘 어리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기억된다는 게 속상할 때가 많았죠. 30대에 접어들면서는 연기를 더 오래 지속하려면 배역의 스펙트럼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요. 다만 기존의 이미지를 버리기보다는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시도해보자 싶었죠.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에 좋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몇 작품 연달아 무거운 배역을 맡다 보니 다시 밝고 경쾌한 이야기를 기다리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다음 작품에서도 쉽지 않은 도전을 앞두고 있죠.(웃음) 디즈니+ 오리지널 <골드랜드> 촬영이 한창이라 들었어요.
맞아요.(웃음) 6월부터 촬영 중인데, 밀수 조직의 금괴를 둘러싼 여러 인간 군상을 그린 장르물이에요. 제가 맡은 ‘희주’가 우연히 금괴를 손에 쥐게 되면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주로 도망 다니는 장면이 많아서 톤 자체가 굉장히 어두워요. 장르물에서 여성 캐릭터가 주가 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 보니 욕심이 났고,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어요. 그래도 다음에는 꼭 밝고 행복한 작품을 만나고 싶습니다.(웃음)
내년이면 데뷔 20주년을 맞이하죠. 오랜 시간 연기를 이어오면서 배우로서의 삶과 한 개인으로서의 삶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지켜왔는지도 궁금해요.
저는 오히려 배우라는 직업이 인생에서 너무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배우 박보영이 아닌 그냥 평범한 서른여섯의 나, 친한 친구들이 바라보는 나, 우리 집 둘째 딸, 사랑하는 조카의 든든한 이모…. 이렇게 배우라는 울타리 바깥에서도 제 자아를 지키며 시야를 넓히려 부단히 노력해왔고, 요즘에도 쉬는 날에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많은 걸 경험해보려 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어떤 경험들이 시선의 확장을 가져다주었나요?
얼마 전에는 서울국제도서전에도 가보고, 서울아트위크 기간에는 전시도 보러 갔어요. 여러 작품을 보면서 느낀 건 작가의 의도나 기법, 작업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나니까 작품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온다는 거였어요. 팬들이 인터뷰나 코멘터리를 즐겨 보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관심을 가지고 깊이 들여다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배우라는 이름 안팎에서 자신을 지켜가려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3년 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아직도 후회되는 순간들,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선택하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달라요. 그때의 선택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이제는 믿어요. <미지의 서울> 속 할머니의 대사처럼, 살자고 한 선택은 다 용감한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경험하고 이겨낼 것 같고요. 그래서 지금은 그저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 마음 그대로 나아가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사실 20년이나 흘렀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데, 20년이 더 흐른 뒤에도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갔다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치열하게 살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치열해질 수 있는 건가요?(웃음)
아뇨, 딱 지금처럼만.(웃음) 때때로 다정함도 잃지 않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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