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가 그리는 새로운 발렌시아가의 윤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2026 가을 컬렉션. 무엇에 주목해야 할까요?


지난해 7월 하우스에 합류한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Pierpaolo Piccioli)가 발렌시아가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시즌, 2026 가을 컬렉션이 공개됐습니다. 이번 컬렉션은 포멀과 캐주얼, 스트리트와 테일러링, 쿠튀르와 테크가 한 장면 안에서 충돌하면서 공존하는 것이 특징인데요. 그는 파리의 거리, 체육관, 출퇴근길, 집 안 등 패션을 위한 무대가 아닌 삶이 실제로 펼쳐지는 공간에서 옷 자체보다 그 옷을 입고 살아가는 몸의 서사에 집중했죠.
또한 배우, 뮤지션, 모델 등 서로 다른 배경과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피치올리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발렌시아가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요. 더보이즈(THE BOYZ)의 주연을 비롯해 알리스 다 루즈(Alix Da Luz), 벤자민 부아쟁(Benjamin Voisin), 키스 파워스(Keith Powers) 등이 등장해 각자의 방식으로 룩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패션과 인물, 그리고 도시의 풍경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서사를 완성했습니다.




지난해 10월, 파리에서 열린 2026 S/S 쇼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한 피치올리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듯한 장식적인 비주얼과 채도, 그리고 그만의 인간적인 온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주목받았습니다. 반면 이번 가을 컬렉션에서는 그 정체성을 쿠튀르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 현대인의 일상으로 내려와 패션의 본질을 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되묻죠. 그리고 그 질문은 피치올리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남성복을 비롯해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 NBA와의 협업이라는 다채로운 방식으로 확장되면서 패션이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고 작동할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탐색했습니다.
이번 시즌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의복의 위계가 과감히 전복됐다는 점이죠. 테일러드 웨어와 이브닝 룩, 스트리트웨어는 물론, 발렌시아가의 유산과 현대적 감각이 결합된 새로운 테크웨어까지 서로 다른 결이 한 시즌 안에 공존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피치올리는 이를 어설프게 뒤섞는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루엣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표현했죠. 모던 스포츠웨어 정체성을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óbal Balenciaga)가 직접 착용했던 클래식 테일러링에서 영감을 받아 풀어내는 식으로요.




이번 시즌 또 하나의 매력은 발끝에서 완성됩니다. 발렌시아가는 마놀로 블라닉과의 첫 협업을 통해 3가지 힐 스타일을 선보이며 컬렉션의 서사를 확장했는데요. 스페인의 뿌리를 공유하는 두 하우스의 만남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유산에 대한 경의이자 몸을 중심에 둔 피치올리의 창작 철학과의 접점에서 탄생했습니다. 데콜테(Decollete) 컷으로 완성된 유려한 실루엣은 피부와 곡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발렌시아가가 말하는 몸의 미학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내죠.
실크 새틴 소재로 제작된 슈즈의 내부는 발렌시아가의 그레이 라이닝으로 통일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또렷이 했는데요. 로우 컷 뱀프를 따라 더해진 크리스털 자수는 마놀로 블라닉 특유의 주얼리 같은 장식적인 미학을 반영하는 동시에, 1960년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비주 디테일을 연상시키며 과거와 현재를 세련되게 연결했습니다.





또한 협업 예고부터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NBA와의 협업을 빼놓을 수 없겠죠. 단순한 로고 플레이를 넘어서 스포츠가 지닌 탁월함과 정직함, 존중, 그리고 팀워크의 가치를 발렌시아가만의 언어로 섬세하게 풀어낸 것이 특징. 피치올리는 서로 다른 배경과 문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동일한 규칙 아래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스포츠 자체에 대한 깊은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번 캡슐은 의류와 슈즈, 액세서리를 아우르며 폭넓은 구성으로 완성됐습니다. 티셔츠, 트랙슈트, 바시티 재킷 등 농구에서 영감을 받은 아이템들이 가죽, 나일론 새틴, 일본 데님 같은 전통적인 소재로 재해석된 것이 특히 눈길을 끄는데요. 소재가 바뀌자 익숙한 실루엣도 문득 새로운 인상을 주지 않나요?
그리고 이번 협업에서 가장 발렌시아가다운 표식은 단연 숫자 10을 의미하는 ‘르 디스(Le Dix)’일 텐데요. 하우스의 역사적인 주소인 파리 조르주 생크 거리의 10번지를 가리키는 이 숫자는 동시대 스포츠와 하우스의 헤리티지를 하나로 엮는 상징처럼 자리하죠.


결국 이번 2026 가을 컬렉션은 새로움이라는 수사를 과장하는 대신 피치올리가 발렌시아가에서 구축하려는 몸, 생활, 그리고 움직임이라는 정체성을 가장 현실적인 장면에 내려놓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하우스의 유산 위에서 지금의 발렌시아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죠. 실루엣의 재구성, 몸을 중심으로 한 미학, 그리고 패션과 스포츠가 교차하는 지점까지,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의 언어로 다시 쓰인 발렌시아가의 2026 가을 컬렉션은 지금 공식 홈페이지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