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게 깔린 안개 속 가로등과 빈티지 카, 그리고 캘리포니아 양귀비꽃처럼 흩날리는 드레스까지. 할리우드의 황금기와 LA의 자유로운 감각을 엮어낸 조나단 앤더슨의 첫 디올 크루즈 2027 컬렉션을 공개했습니다.

© Dior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의 공기

이번 크루즈 컬렉션은 시작부터 강렬했습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로 퍼지는 푸른 안개, 오래된 미국식 가로등, 그리고 헤드라이트 불빛을 켠 클래식카. 런웨이장은 마치 196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 세트장처럼 연출됐는데요. 모델들은 정해진 캣워크 대신 도시의 밤거리를 걷는 듯 자유롭게 공간을 가로질렀습니다. 컬렉션은 할리우드와 디올의 오랜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조나단 앤더슨은 이번 크루즈 쇼의 영감을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 <스테이지 프라이트(Stage Fright)> 속 Marlene Dietrich가 입었던 1949년 디올 오트 쿠튀르 재킷에서 받았다고 밝혔죠. 여기에 캘리포니아의 늦봄을 상징하는 양귀비꽃 이미지를 더하며 컬렉션 전반에 부드러운 플로럴 무드를 스며들게 했습니다. 그는 이번 쇼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할리우드와 함께해온 디올의 풍부한 역사는 이번 컬렉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컬렉션은 늦봄 들판을 가득 채운 캘리포니아 양귀비꽃처럼 생동감 있게 피어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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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사이를 흐르는 실루엣

이번 시즌 여성복은 움직임 자체에 집중한 듯 보였습니다. 얇은 플리츠 드레스는 걸을 때마다 공기처럼 흔들렸고, 꽃잎을 연상시키는 장식은 몸의 움직임에 따라 유기적으로 흩날렸죠. 옅은 옐로와 바이올렛, 파우더 핑크, 번트 오렌지 컬러는 LA의 석양과 네온사인을 동시에 떠올리게 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플라워 장식이 달린 드레스들이었습니다. 거대한 꽃장식을 허리선에 더한 블랙 드레스, 양귀비꽃이 흩뿌려진 듯한 오렌지 컬러 룩,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핑크 드레스까지.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실루엣 안에서 디올 특유의 꾸뛰르 감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죠. 부클레 울 재킷과 해진 커프 디테일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정제된 테일러링보다 살짝 흐트러진 질감을 강조하며, LA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를 담아낸 것인데요. 여기에 레이스 이브닝드레스와 시어링 코트 등을 매치하며 빈티지 무드를 현대적으로 풀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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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룩 역시 컬렉션의 중요한 축이었습니다. 시퀸이 촘촘하게 수놓인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는 조명 아래에서 은은하게 반짝였고, 깊게 파인 재킷과 레더 팬츠 조합은 70년대 록스타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죠. 블랙 슈트에는 불필요한 장식을 덜어내고 실루엣 자체에 힘을 실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포인트는 미국 아티스트 Ed Ruscha와의 협업입니다. 클래식한 아메리칸 셔츠에 기존 작품의 그래픽 요소를 녹여내며 LA 아트 신(Scene)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연결했는데요. 조나단 앤더슨은 이를 통해 패션과 예술, 그리고 도시의 문화를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가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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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 슈즈에도 이어진 디테일

액세서리 역시 이번 컬렉션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중요한 장치였습니다. 새롭게 재해석된 새들 백은 기존보다 한층 간결하고 날렵한 실루엣으로 등장했고, 디올 메달리온 장식을 더한 버킷 백과 초승달 형태의 숄더백도 함께 공개됐죠. 체인 스트랩 위로 반짝이는 장식과 플라워 디테일을 더해 빈티지 주얼리 같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슈즈 역시 드레스의 움직임과 자연스럽게 연결됐는데요. 꽃 장식이 달린 힐과 시퀸 슈즈는 런웨이 위 조명과 만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냈죠. 특히 모델들이 넓은 공간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연출 덕분에 옷의 질감과 움직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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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앤더슨이 그리는 새로운 디올

이번 크루즈 2027 컬렉션은 단순히 ‘할리우드 무드’를 차용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영화 속 장면, LA의 밤공기,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감각, 그리고 디올의 아카이브를 하나의 흐름 안에 자연스럽게 엮어냈죠. 과거를 재현하기보다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편집한 방식에 가까웠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조나단 앤더슨 특유의 균형감입니다. 꾸뛰르적인 디테일은 유지하면서도 지나치게 무겁지 않았고, 드라마틱한 연출 속에서도 실제로 입고 싶은 옷들이 분명 존재했죠. 할리우드의 화려함과 LA 특유의 느슨한 태도 사이. 디올은 그 경계를 이번 컬렉션 안에서 꽤 매력적으로 풀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