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5년 9월호 <마리끌레르> n°277, 사진 헬무트 뉴턴(Helmut Newton).
“패션은 단순한 ‘외양(paraitre)’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방식(être)’이어야 한다.” 전설적인 패션 저널리스트이자 <마리끌레르> 프랑스판의 전 편집장 클로드 브루에가 이 문장을 몸소 증명하던 시절, <마리끌레르>는 한 권의 패션 매거진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에 가까웠다. 한 권의 잡지가 하나의 취향이자 태도가 될 수 있었던 시대. 당시의 <마리끌레르>는 단지 옷을 소개하는 여성지가 아니라, 새로운 여성성과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문화적 플랫폼에 가까웠다.

1982년 3월호 <마리끌레르> n°355, 사진 로타르 슈미트(Lothar Schmitt).
마리끌레르 코리아 400호 기념으로 출간 예정인 클로드 브루에의 자서전 <Claude Brouet, Journaliste de Mode(패션 저널리스트, 클로드 브루에)>는 프랑스 패션 저널리스트 클로드 브루에의 반세기 커리어를 되짚는 회고록이다. 매거진 <엘르>와 <마리끌레르>를 거쳐 에르메스 여성복 디렉터 시절까지. 그가 지나온 시간은 곧 20세기 여성 패션 저널리즘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순간은 단연 1970~1980년대의 <마리끌레르>다. 장 폴 고티에는 서문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패션쇼장 안에 ‘마리끌레르의 여자들(Dames du Marie Claire)’이 들어 와야 비로소 쇼가 시작됐습니다.” 클로드 브루에를 필두로 편집부 에디터들이 자리에 앉는 순간, 마치 공간 전체에 조명이 켜진 듯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 <마리끌레르>는 그 자체로 독보적 권위였고, 동시에 새로운 취향의 기준이었다.

1972년 1월호 <마리끌레르> n°233, 사진 아서 엘고트(Arthur Elgort).
클로드 브루에가 특별했던 이유는 패션을 트렌드나 소비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궁금해한 건 옷 자체가 아니라, 그 옷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였다. 여성이 옷을 입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태도를 갖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더 자유로워지는지 말이다. 오트 쿠튀르 중심의 시대가 저물고 프레타포르테가 부상하던 시기에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여성들의 실제 삶 속으로 들어온 옷들에 주목했다. 소니아 리키엘의 부드러운 니트, 에마뉘엘 칸의 셔츠와 블라우스, 장 폴 고티에의 젠더리스 실루엣처럼, 당시에는 낯설고 급진적으로 여겨지던 흐름을 누구보다 빠르게 포착하고 지지했다. 디올의 뉴 룩 이후 여성의 몸을 강하게 조이던 1950년대 식 실루엣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옷, 여성의 움직임과 일상을 존중하는 새로운 형태의 우아함을 중요하게 바라본 것이다. 그가 사랑한 디자이너들 역시 단순히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여성의 삶과 태도를 제안하는 인물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그가 만든 <마리끌레르>는 ‘스타일링’이라는 개념 자체를 새롭게 정의했다. 완벽히 갖춰 입은 토털 룩에 얽매이지 않은 채 서로 다른 아이템을 섞고, 남성복 요소를 여성복 안으로 끌어들이고, 손을 주머니에 넣은 자연스러운 자세와 움직임까지 하나의 스타일로 받아들였다. 당시 잡지가 보여준 여성은 더 이상 정적인 살롱 안의 귀부인이 아니라 거리를 누비며 살아가는 현실의 여성이었다. 옷은 특정 계층의 우아함을 과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에 가까워졌다. 피터 린드버그와 파올로 로베르시, 아서 엘고트 같은 사진가들이 만들어낸 이미지 역시 이러한 변화와 맞닿아 있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포즈보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정적인 우아함보다 살아 있는 여성의 순간을 담아내려 한 것이다.

사진 헬무트 뉴턴(Helmut Newton), 1973년.

1973년 10월호, <마리끌레르> n °254, 사진 헬무트 뉴턴(Helmut Newton).

1971년 12월호 <마리끌레르> n °232, 사진 한스 포이어(Hans Feurer).
장 폴 고티에는 책에서 당시의 <마리끌레르>를 회상하며, 상업성보다 매거진의 태도와 취향이 더 선명했던 시대였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클로드 브루에는 유명 브랜드나 상업적 권위에 기대기보다 자신이 진정으로 새롭다고 느낀 디자이너와 이미지를 과감하게 지면에 실었다. 지금은 전설로 여겨지는 이들 역시 당시에는 막 등장한 신예에 가까웠다. 고티에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컬렉션이 끝날 때마다 클로드 브루에와 편집부 에디터들이 쇼룸을 찾아와 옷 하나하나를 직접 살펴보던 장면을 회상한다. 그들은 단순히 ‘예쁜 옷’을 고르는 대신, 왜 이런 소재를 썼는지, 왜 이런 실루엣이 나왔는지 집요하게 질문했다고 한다. 클로드 브루에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그 장면을 조율하며 각 에디터에게 어울리는 룩을 제안했다. 그에게 패션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한 시대의 태도와 시선을 읽어내는 방식에 가까웠다.

1984년 2월호 <마리끌레르> n °378, 사진 파올로 로베르시(Paolo Roversi).

1981년 1월호 <마리끌레르> n °341, 사진 피터 냅(Peter Knapp).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클로드 브루에가 패션을 바라보는 감각이 잡지업계 안에서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어머니는 샤넬을 거쳐 스키아파렐리 살롱 디렉터로 일했다. 어린 시절 클로드 브루에는 오트 쿠튀르 살롱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자랐고,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초현실주의적 감각과 예술적 판타지를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살바도르 달리와 협업한 향수 보틀, 금빛 케이지처럼 꾸민 쇼룸, 장인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쿠튀르의 디테일까지. 어린 시절의 기억은 훗날 그가 옷을 상품이 아닌 문화 예술의 일부로 바라보게 만든 토대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기억 역시 클로드 브루에의 세계관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와 유대인 친구들의 노란 별, 전쟁으로 무너진 일상 속에서도 어린 그는 시골집에 보관돼 있던 <마리끌레르> 과월호와 다른 패션 잡지들을 읽고 또 읽으며 패션과 여성 문화에 대한 감각을 키웠다. 영화 속 배우들에게서 발견한 여성성 또한 중요했다. 로렌 바콜의 무심한 우아함, 리타 헤이워스의 움직임, 조앤 크로퍼드의 실루엣까지. 그에게 패션은 늘 옷 자체보다 그것을 입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태도와 분위기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왜 패션은 계속 변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다고 회상한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충분히 아름다운데, 왜 또 새로운 것이 필요하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그것을 입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이야.” 그는 아주 일찍부터 패션이란 유행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패션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동시에 20세기 패션계의 황금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한 사람의 기록이다. 디올의 뉴 룩이 등장하던 순간의 충격, 프레타포르테가 오트 쿠튀르의 권위를 조금씩 대체해가던 흐름은 물론, 피에르 가르뎅과 나눈 젊은 시절의 우정과 신인이던 장 폴 고티에를 바라보던 시선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패션사로 남은 장면들이 클로드 브루에의 시선을 따라가는 이 책 안에서는 놀라울 만큼 생생한 현재로 되살아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그가 언제나 “새로운 여성”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유행하는 옷을 좇기보다, 동시대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움직이며 변화하는지를 오래도록 관찰한 사람이다.


1977년 12월호 <마리끌레르> n°304, 사진 장 프랑수아 종벨(Jean-François Jonvelle).
1974년 12월호 <마리끌레르> n°268, 사진 브루스 로런스(Bruce Laurance).

1984년 5월호 <마리끌레르> n°381, 사진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
오늘날 패션 이미지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소비된다. SNS에서는 수많은 룩과 트렌드가 실시간으로 떠오르고 또 사라진다. 하지만 클로드 브루에는 끝까지 ‘옷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고민한 인물이다. 그는 유행보다 사람을, 소비보다 태도를 먼저 바라봤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 이상의 울림을 남긴다. 패션 저널리즘이 한때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패션을 통해 진짜 보고 싶은 것 이 무엇인지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패션은 단순한 ‘외양(paraitre)’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방식(être)’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