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계와 주얼리 홍보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한 필자는 퇴사 후에도 타인의 장신구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직업병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필자는 친구들의 쇼핑을 적극적으로 돕고 시대극 드라마의 소품 고증을 분석하며 직업적 경험과 전문성을 일상에서 발휘합니다.
- 과거의 업무 경험으로 형성된 높은 안목과 취향 덕분에 필자는 좋아하는 분야를 더 깊이 이해하고 즐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행복할까요?
글쎄요. 제 경우에는 몸이 퇴근해도 머릿속은 좀처럼 퇴근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회사를 그만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20대 중반부터 10년이상 럭셔리 워치와 주얼리를 홍보하며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업무를 잘하기 위해 공부하고 관찰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취향이 되더군요.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 혼자 바쁘게 보고, 분석하고, 참견합니다. 심지어 그게 꽤 재미있어서 그만둘 생각도 없고요.
오랫동안 한 분야에 몸담으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저만의 직업병들. 오늘은 일을 떠난 지금도 제일상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일곱 가지 습관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얼굴보다 먼저 보이는 것이 생겼다.
20대 중반, 워치 브랜드 IWC 샤프하우젠 마케팅팀에서 첫 정규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자 시계 브랜드는 물론 컬렉션에 따라서도 착용자의 취향과 성향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이런 저만의 ‘재능’이 가장 빛을 발한 곳은 다름 아닌 소개팅 자리였습니다. 눈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손목으로 시선이 향하면 혼자 분석을 시작했죠. 클래식한 디자인을 선호하는지, 크로노그래프나 퍼페추얼 캘린더처럼 기능에 관심이 있는지, 해외 출장이 잦아 월드타임 워치를 선택했는지, 나아가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자기만족을 우선하는지, 심지어 안정형인지 쾌락형인지까지 착용한 시계를 토대로 추측해봤습니다.
이후 주얼리까지 다루는 까르띠에로 이직하면서 관찰의 영역은 손목에서 귀와 목, 손가락으로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브랜드만이 아니라 같은 브랜드 안에서도 어떤 컬렉션을 선택했는지에 따라 취향을 더 세밀하게 읽게 됐죠. 같은 까르띠에를 좋아하더라도 비슷한 예산으로 트리니티를 선택한 사람과 클래쉬를 선택한 사람은 전혀 다른 취향의 소유자이니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저 혼자 하는 분석일 뿐입니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남의 시계와 주얼리를 열심히 관찰하던 제가 결국 결혼한 사람은 시계도 주얼리도 전혀 착용하지 않는 남자라는 사실입니다.
2. 셀럽의 주얼리를 보며 다음 앰버서더 계약을 의심한다.
평소 특정 브랜드와 별다른 인연이 없던 셀럽이 레드카펫이나 공항에서 한 브랜드의 주얼리를 세트로, 그것도 유난히 잘 보이게 착용하고 등장했다면?
저의 의심은 시작됩니다. 해당 셀럽에게 다른 주얼리 브랜드와의 계약이 없고, 마침 그 브랜드의 기존 앰버서더가 한동안 #광고 게시물을 올리지 않았다면 의심은 더욱 짙어집니다.
혹시 새로운 앰버서더 계약을 앞두고 있는 건 아닐까, 혼자 퍼즐을 맞추기 시작하는 겁니다.
요즘은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직장에 다니지 않다 보니 유튜브와 SNS, 온라인 기사를 보는 시간이 오히려 늘었습니다. PR 담당자로 일할 때도 누구보다 열심히 모니터링했는데, 지금은 거의 바보상자에 빠져 사는 수준이죠. 덕분에 머릿속에는 셀럽들의 이미지와 SNS 영향력, 차기 작품 계획은 물론 남성 셀럽의 군 입대 일정까지 데이터베이스를 착실히 쌓아두고 있습니다. 누가 어떤 브랜드와 어울릴지 혼자 궁합을 맞춰보는 일도 여전하고요. 이럴 일인가 싶다가도 이제는 꽤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 브랜드에서 일하는 옛 동료들이 의견을 구해올 때면, 이렇게 쌓아둔 정보로 무료 컨설팅을 해주는 재미도 쏠쏠하거든요.
3. 잘못 착용한 주얼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오랫동안 주얼리 화보 촬영을 담당하며 제품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와 착용법을 연구해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쁜 주얼리를 사고도 제대로 착용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네크리스의 잠금장치가 돌아가다 못해 펜던트 옆까지 내려와 있거나, 사이즈가 큰 반지가 손가락에서 이리저리 돌아가는 모습처럼요. 반지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실리콘 이너 밴드만 사용해도 훨씬 안정적으로 착용할 수 있는데 말이죠.
특히 오랫동안 담당했던 까르띠에 제품에는 유난히 매의 눈이 됩니다. 트리니티 링의 세 밴드가 어색하게 꼬여 있거나, 좌우가 구분된 이어링을 반대로 착용해 디자인이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저스트 앵 끌루 스몰 브레이슬릿도 마찬가지입니다. 못 머리와 끝부분이 맞닿도록 착용해야 하는데, 반대로 채우면 사이가 벌어져 본래의 형태가 흐트러지거든요.
문제는 이걸 발견하고도 모른 척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심지어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은 분의 저스트 앵 끌루 브레이슬릿을 다시 채워드린 적도 있습니다. 원래도 오지랖이 넓은 편인데, 주얼리를 향한 애정까지 더해지니 이제는 모르는 사람의 손목까지 걱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4. 친구들의 주얼리 쇼핑에 전문 상담원이 된다.
화보 촬영과 셀럽 협찬 업무로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부티크를 드나들다 보니, 주얼리와 시계 매장의 문턱을 높게 느끼지 않게 됐습니다. 다른 브랜드의 매장에도 편하게 들러 신제품을 살펴보고 직접 착용해보곤 했죠. 그러다 보니 집에는 각 브랜드의 카탈로그가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심심할 때 꺼내 보며 공부하는 재미도 있지만, 문제는 세상에 예쁜 시계와 주얼리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매번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서 제게 가장 신나는 순간은 바로 친구의 쇼핑입니다. 한번은 예물 시계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친구와의 약속에 무려 여덟 권의 시계 카탈로그를 낑낑 거리며 들고 나간 적이 있습니다. 각 메종의 역사부터 컬렉션별 특징, 제품에 얽힌 스토리까지 세일즈 직원처럼 줄기차게 설명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친구가 좀 민망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단순히 예쁜 디자인을 고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시계가 왜 특별하며 네가 꼭 차야만 하는지 까지 열심히 이야기한 덕분일까요? 카탈로그 여덟 권을 강제로 봐야 했던 그 친구는 결국 고민하던 예거 르쿨트르 랑데부 나잇&데이 11모티브 다이아몬드 모델 대신 베젤 전체에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주얼리 워치를 선택했습니다. 아무도 시킨 적 없는 업셀링(?)까지 한 셈인데, 10년도 훨씬 지난 지금도 정말 만족하며 착용하고 있다니 다행이죠.
그 외에도 결혼기념일이나 보너스를 계기로 주얼리를 구매하려는 친구들이 연락해오면 기다렸다는 듯 상담을 시작합니다. 워낙 제품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좋아하다 보니 제 설명을 듣고 구매한 친구들의 만족도도 꽤 높은 편입니다. 한번 구매한 뒤에는 다음에 함께 매치할 주얼리까지 추천해달라는 부탁도 받곤 합니다.
무엇보다 남의 돈으로 쇼핑하는 기분이라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이쯤 되면 전업 퍼스널 쇼퍼로 나서야 하는 건 아닐까요?
5. 시대극을 보면 고증부터 의심한다.
제 인생 드라마 중 하나는 <미스터 션샤인>입니다. 특히, PR 담당자로서 시대극임에도 ‘불란셔 제빵소’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파리바게트의 PPL이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현대 브랜드를 극의 시대적 배경에 녹여낸 방식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에 푹 빠져 보던 중, 김희성(변요한)의 중요한 복선으로 등장하는 회중시계가 눈에 걸렸습니다. 초침이 부드럽게 흐르지 않고 정확히 1초 간격으로 뚝뚝 끊겨 움직이고 있었거든요. 기계식 시계가 아닌 쿼츠 무브먼트의 움직임처럼 보였습니다. 극의 배경은 1900년대 초반인데, 쿼츠 무브먼트가 처음 개발된 것은 1927년이니 시대 고증에 오류가 있었던 거죠.
그 순간부터 저는 드라마를 보면서 안타까움에 땅을 쳤습니다.
‘내가 이 드라마의 제작을 미리 알았다면 까르띠에 산토스 워치 협찬을 제안했을 텐데!’
1904년 탄생한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 산토스는 회중 시계가 흔했던 시대에 등장한 혁신적인 시계였으니, 조선 제일의 부잣집 자제이자 멋쟁이였던 김희성의 소장품으로 정말이지 딱이었을 것 같았습니다. 물론 실제로 등장 시키려면 본사가 소장한 (문화재나 다름없는) 히스토리컬 모델을 들여와서 시계가 촬영장에 오갈 때마다 손상된 부분이 없는지 살 떨리는 체크를 하는 말도 안되는 수고를 담당자인 제가 짊어져야 했겠지만요.
그 뒤로는 <정년이>, <설강화>, <경성크리처> 같은 시대극을 볼 때도 당시 이미 존재했던 시계와 주얼리 컬렉션을 떠올리곤 합니다. 시대 고증에도 어긋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사랑받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디자인이라면, 드라마 속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그 오랜 역사를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지 않을까요? 덕분에 드라마를 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자꾸 PPL 제안서가 만들어집니다.
드라마 소품팀 관계자 여러분, 혹시 시계나 주얼리 자문이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즐겁게 상담해 드리겠습니다!
6. 가격표에 붙은 0의 개수에 무뎌졌다.
하이 주얼리 이벤트 현장에 나와 일하다 보면 수십억 원은 물론, 100억 원이 넘는 주얼리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제품들을 거듭해서 보다 보니 어마어마한 가격에도 좀처럼 놀라지 않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제 수입까지 그에 맞춰 늘어난 건 아닌데 말이죠. 문제는 눈높이만큼은 좀처럼 내려갈 생각을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시계나 주얼리를 구매할 때면 감당할 수 있는 예산 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개는 가장 비싼 제품을 선택하는 편입니다. 경험상 마음에 드는 제품을 사면 주얼리라도 남지만, 구매를 포기하거나 조금 저렴한 제품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 돈이나 차액이 통장에 남는 건 아니더라고요. 물론 그 때문에 한동안 외식을 줄이고 택시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50~60대쯤에나 사려고 했던 골드 브레이슬릿 주얼리 워치를 일찍 장만했고, 착용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던 화려한 샹들리에 이어링이나 무지개색 사파이어가 세팅된 이어링도 제 주얼리 박스에 들어왔습니다. 가격 때문에 끝까지 고민하다 타협해서 구매한 제품에는 종종 아쉬움이 남았지만, 정말 원했던 제품을 선택했을 때는 시간이 지나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좋은 주얼리를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본 탓이었을까요? 적어도 제 취향만큼은 타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7. 인터내셔널 하이 주얼리 이벤트 장소를 좇는다.
하이 주얼리 메종들의 인터내셔널 이벤트는 단순히 파리의 어느 호텔에서 열리는 행사가 아닙니다. 그리스의 포르토 헬리, 모로코의 마라케시, 남프랑스의 생트로페, 프랑스 알프스의 쿠르슈벨(Courchevel), 이탈리아의 코모 호수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찾아가기는 쉽지 않은 장소들이 무대가 되곤 하죠. 메종은 고객을 그곳으로 초대해 주얼리뿐 아니라 그 장소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까지 선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퇴사한 지금도 각 메종이 올해는 어디에서 하이 주얼리 이벤트를 열었는지 열심히 찾아봅니다. 그들이 선택한 장소라면 현시점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일 테니까요. 어떤 풍경을 배경으로 주얼리를 선보였는지, 어떤 공간에 갈라 디너를 차렸는지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만의 여행 버킷리스트가 늘어납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개인적으로라도 꼭 가보고 싶은 곳들입니다. 가끔은 그 경험을 다시 하고 싶어서라도 재취업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그리스 포르토 헬리의 아만조에(Amanzoe) 리조트에서 열린 루이 비통 하이 주얼리 이벤트였습니다. 사실 저는 자연경관에 크게 감탄하는 편도 아니었고, 그리스에 대한 특별한 환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 질 녘, 절벽 앞에 마련된 갈라 디너에 앉아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순간 눈물이 왈칵 날 것 같더라고요. 그곳에서 자연광을 받아 빛나던 최고의 산지에서 만들어진 보석들의 컬러 역시 잊을 수 없습니다. 말로 설명하기도, 휴대전화 카메라에 온전히 담기도 어려운 ‘완전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런 순간들을 경험했으니, 회사를 떠난 뒤에도 하이 주얼리 메종들이 다음에는 지구상의 어떤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낼지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돌이켜보면 일할 때는 모두 필요한 능력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더 자세히 살펴보고, 작은 차이도 놓치지 않는 것. 그때는 일을 잘하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을 혼자 열심히 하고 있으니 가끔은 스스로도 피곤하고 현타가 올 때도 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좋습니다. 예전에는 업무 일정에 쫓겨 다음 컬렉션, 다음 행사로 넘어가야 했다면 지금은 마음에 드는 주얼리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고, 궁금한 이야기를 찾아보는 데 얼마든지 시간을 쓸 수 있으니까요. 일을 하며 얻은 안목이 지금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깊이 즐기는 방법이 되어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을 시작할 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하지 않았네요.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행복하냐고요?
지금은 그런 것 같습니다.
요즘은 아직도 퇴근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애초에 퇴근할 생각이 없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