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자기 인생의 편집자다. 매일, 매 시간, 무슨 사건을 어떻게 기록해서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길지 결정하니까. 쿤 작가와 배우 이희준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기록하고 편집해왔다. 이들의 2인전 <Edited Records / 편집된 기록>에서 나눈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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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ed Records / 편집된 기록>은 어떤 전시인가요? 제목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저희 중 한 명은 매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이고, 또 한 명은 그 매체에 직접 등장하는 사람이죠. 반대에 있는 것 같지만, 둘 다 무언가를 관찰하고 기록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이희준 배우는 배우로서 여러 대상을 꾸준히 관찰해서 드로잉으로 기록해왔고요. 저는 다양한 매체, 특히 광고나 영화, 게임 등에 등장하는 것 중 좋아하는 것들을 저의 페르소나와 합쳐서 끊임없이 기록했죠. 또 두 사람 모두 그것들을 단순하게 나열하지 않고 ‘편집’이라는 기법을 사용해왔어요. 저는 기록들을 오려 붙이는 등의 방식으로 하나의 캔버스 안에서 만나게 했고, 배우님은 관찰하고 연구한 대상들을 자기 자신에 통과시키는 또 다른 형태의 편집을 해서 역할에 투영하더라고요. 이런 교차점이 그대로 전시의 주제가 됐어요.

편집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어떤 기준으로 편집의 대상이나 방향을 정하나요?

이희준 특별한 기준이나 관점이 있다기보다 그냥 느낌인 것 같아요. 길 가다가도 ‘아, 저 사람 그리고 싶다’ 하는 순간이 있어요.(웃음) 원래 배우로서도 관찰을 엄청나게 재밌어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지하철에서, 여행하면서 마주친 사람들, 친구들, 가족들, 같이 사는 고양이… 이것들을 그림 자체로만 두지 않고 여행지의 티켓이나 거기서 본 광고 문구, 지하철 노선도 같은 것들과 함께 편집해서 콜라주 했죠. 그러면서 또 새로운 의미가 있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언제부터 관찰의 기록을 그림으로 남겼나요?

이희준 처음 끄적끄적 드로잉을 시작한 건 15년 전 쯤이에요. 촬영장에서는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서요.(웃음) 차 안에서 계속 기다리면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요. 그러다 보니 많이 모였어요. 또 특별히 제게 의미가 있는 분을 만나면 술 한 잔 하다가 그 분 앞에서 바로 드로잉을 하기도 해요.

전시된 작품 곳곳에서 텍스트도 발견할 수 있는데요. 특히 쿤 작가는 거의 모든 작품에 텍스트를 대담하게 배치했어요.

광고 같은 영상을 굉장히 좋아해요. 대학에서도 디자인을 전공한 지라 타이포그래피 등이 주는 선명한 메시지도 좋아하고요.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예전에는 영어를 많이 썼는데요. 요즘에는 한글로 표현하는 게 재밌어요. 과거의 저는 ‘있어 보이는’ 뉘앙스를 풍기는 걸 좋아했다면, 지금은 ‘사랑과 평화’ 같은 단어를 직접 노출하는 게 더 끌리거든요.

영어와 알파벳에서 한글로 관심을 옮긴 계기가 있나요?

그냥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는 매체 영향을 엄청 많이 받는 사람이라 희준 배우님처럼 글로벌하게 활동하는 한국인들에게 분명히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웃음) 시대의 흐름이 제가 한글을 시각적으로 멋지다고 받아들이게 해준 거죠.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저희가 같은 학교를 나오긴 했는데, 그때부터 친했던 건 아니고요.(웃음) 나중에 우연히 희준 배우가 제 전시에 왔어요. 그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성격도 잘 맞더라고요. 그래서 가깝게 지내게 됐죠. “우리 같이 작업해보자”라는 얘기도 계속 했는데, 결국 한 8년 만에 2인전을 하게 됐네요.

이희준 이전에도 쿤 작가님이 키아프에서 전시할 때 잠깐 협업한 적은 있는데요. 정식으로 이렇게 함께 전시를 하는 건 처음이에요.

이렇게 2인전을 열며 서로에게 새롭게 영향받은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이희준 너무 많이 배웠어요. 아무래도 전공자가 아니라, 제 그림의 한계랄까요? 무엇이 부족한지를 많이 알게 됐고요.(웃음) 작가님이 ‘드로잉을 많이 해온 점을 살려서 앞으로 어떻게 더 그려 보면 좋겠다’는 식으로 방향도 제시해줬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배우이기도 하고 감독이기도 한 분과 작업을 하다 보니, 그날그날 감독이나 프로듀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달라지더라고요. 이런 관계가 재밌게 느껴졌어요. 또 제가 희준 배우에게 가장 많이 영향받은 건 태도의 영역인 것 같아요. ‘저 사람이 저 자리에서 저렇게 연기하는 이유가 있구나,’ ‘구체적인 이야기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10년 넘게 드로잉을 했는데,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잖아요. 자기가 그냥 좀 더 연구하려고 만든 것들이 이런 결과를 만든 거죠.

이번 전시에서 각자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요.

이희준 아무래도 15년 간 쌓아온 드로잉 노트에 있던 다양한 그림을 가위로 오려내서 콜라주한 작품이지 않을까요. ‘감사하게도 이 그림을 사겠다고 하시는 분이 있다면, 내가 정말 팔 수 있을까?’ 할 정도로요. 제가 15년 간 만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 있거든요. 그리운 친구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아내가 임신했을 때의 모습도, 촬영장에서 만난 상대 배우도, 전부 다요. 이걸 누군가에게 양도한다고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나는 느낌이에요.(웃음) 그만큼 애착이 많은 것 같아요. 저 모든 것들이 다 저니까요.

제가 처음에 그림을 팔 때, 연륜 있는 갤러리 관장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그 그림은 다른 집에 가서 제 역할을 하면 되는 거다.”(웃음) 근데 사실 저는 이희준 배우의 연극을 보면서 ‘이 순간이 끝나면 날아갈 무대를 위해서 저 열정을 다해 연기를 한다고?’ 싶었거든요. 결국엔 그림을 보내주는 것도 연극하는 마음과 같지 않을까요? 무언가를 내가 만들었다고 해서 꼭 나한테 필요한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희준 날아가도 된다.(웃음) 그래서 작가님이 가장 마음 가는 작품은요?

아, 최근에 바뀌었어요. ‘a flower is not a flower’라는 작품인데요. 제 페르소나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고양이 페르소나는 제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담은 거예요. 어머니에서 출발해서 지금은 아내에게도 영감 받고 있고요. 얼마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입관을 하시는데, 누워 계신 할머니 옆에 꽃이 다 정면을 보고 있더라고요. (작품을 가리키며) 이 그림을 그릴 때 그 장면이 딱 오버랩 됐어요. 돌아가신 어머니와 할머니, 그러니까 제 곁에 있던 여성의 사라짐이랄까요. 그런 것이 담겨서 가장 애착이 느껴져요. 이 고양이 페르소나에 할머니, 어머니, 아내의 모습까지 들어가 있다 보니 판매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희준 다른 집에서 좋은 역할을 할 수도 있잖아요.(웃음)

아내가 달라고 해서요.(웃음) 저것만은 (팔면) 안 된대요.

마지막으로, 전시를 통해 전하고 꼭 싶었던 메시지가 있을까요?

이희준 정말 사소하고 개인적인, 어떻게 보면 일기 같은 그림들을 보여 드리게 되었는데요. 저는 그리면서 행복했고요. 보시는 분들에게도 소소한 재미와 공감을 줄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게 유일한 소망이에요.

저는 이번에 작업하면서 ‘고통’을 그리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사실 예전에는 슬프거나 힘든 저의 모습을 많이 담았는데요.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어떻게 보면 ‘행복한 그림’이라고 할 수도 있고, 달리 보면 ‘외면이 많은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요즘 ‘릴스’나 ‘쇼츠’ 같기도 해요.(웃음) 어쩌면 지금은 고통을 정면으로 맞이하기보다는 행복을 좀 더 보고 싶은 상태인지도요. 이걸 보는 분도 똑같이 행복을 바라 보고 가시면 좋겠네요.

쿤 작가 x 이희준 배우 2인전 <Edited Records / 편집된 기록>
기간 2025년 7월 4일(금) – 8월 6일(수)
장소 호아드 갤러리 2F / 호아드A (프로젝트 룸) 1F(서울시 종로구 율곡로1길 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