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 트로이트 Monika Treut

1970년대 중반 비디오아트로 시작한 모니카 트로이트 감독은 1985년 첫 번째 장편영화 <유혹: 잔인한 여자>를 시작으로 <버진머신>(1988), <부정한 여자>(1992), <젠더넛츠>(1999), <빛의 전사>(2001) 등을 선보이며 퀴어 시네마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모니카 트로이트는 작품에서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분방하고 비행적인 여성을 그리면서 성 정치학에 꾸준히 일조하며 문제를 제기해왔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운영진은 모니카 트로이트 감독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는 동시에 회고전을 열어 여성주의에 눈과 귀를 연 이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불어넣었다.

방금 페미니즘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오는 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논의가 한창이던가? ‘미투 운동’.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미투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페미니즘의 제4의 물결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1980년대부터 실험적인 퀴어 영화를 만들어왔다. 규범적인 여성상을 뒤집고 거침없는 성적 해방을 외치게 만든 계기가 궁금하다. 나의 어머니는 아주 재능 있고 똑똑한 분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은 여성의 권익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사업을 하고 싶어 했는데 많은 반대에 부딪혀 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사업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가정주부로 불행하게 사셨다. 어렸지만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부당하다고 느꼈고, 나는 저렇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머니 역시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내게 늘 말씀하셨다. 결혼은 하지 말고 돈을 직접 벌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라고.

현재 독일의 페미니즘에서는 어떤 문제가 대두되고 있나? 좋은 질문이다. 서양에서는 지금까지 세 번에 걸친 페미니즘 운동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영국과 독일에서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참정권 획득을 위한 움직임이다. 1960년대에 일어난 두 번째 물결에서는 낙태를 할 권리, ‘여자의 몸에 대한 권리는 여자에게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일터에서의 평등에 대한 주장도 그때 시작됐다. 독일에서도 여전히 평균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15퍼센트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말이다. 한국은 이보다 더 차이가 극심하지 않을까 싶다. 독일 페미니즘의 세 번째 물결은 1980년대 말에 시작됐는데 여성들의 성적 해방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여성을 위한 포르노그래피를 만든다던가, 여성의 성적인 자기표현을 자유롭게 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리고 네 번째 물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독일을 포함해 현재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미투 운동이다. 표면적으로 주된 메시지는 일터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희롱, 성폭력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주창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으로부터 받는 시선들에 대한 부정이 담겼다. ‘저 여자는 옷을 왜 저렇게 입었어?’, ‘노처녀라서 히스테리를 부리네’ 등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여자라는 이유로 또 다른 프레임을 통해 보여지는 관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현재 독일도 미투 운동이 한창이다.

지금 한국의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깊게 인식하고 체득하려 노력한다. 여성들은 기득권층인 남성들에게 쌓인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고 남성들은 그런 여성들의 태도를 불편하게 여긴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혐오가 거세지고 있다. 독일에서도 여성 혐오적인 발언을 하는 남성들이 있다. 하지만 여성들은 무시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데다, 여자친구도 없는 루저들이 하는 말이라고 치부하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남혐’, ‘여혐’이 중요한 이슈인 이유는 페미니즘에서 여성만 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참여해서 변해야 하고, 남성들과의 대화를 지속시켜야만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이 될 수 있다. 독일에서는 최근 남성의 육아휴직이 고무적인 현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나와 함께 일하는 에디터와 카메라맨은 30대 커플인데 에디터는 재능 있고 일 욕심이 많은 여성이라 아이는 남편에게 맡기고 일터로 나가 열심히 일을 한다. 육아휴직을 한 남편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무척 즐거워한다. 이런 트렌드가 독일의 신세대 사이에서 많이 눈에 띄는데, 그 안에서 남성들은 이전의 남성들이 하려고 하지 않던 새로운 기술인 설거지나 청소 등의 집안일을 습득하면서 더 부드러워지고 여성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한국에도 아내 또는 여자친구를 위해 행동하는 남성들이 많지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자체에 지레 겁을 먹는 남성이 더 많다. 포털사이트에는 ‘내 여자친구가 페미니스트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같은 질문이 태반이다. 하하. 남성들은 스스로 ‘남성성’이 무엇인지 다시금 고민해봐야 할 때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가 무척 빠르게 변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다. 남성이 사냥을 해야 했던 과거에는 힘이 세고 근육도 큰 전통적인 ‘남성성’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소통 능력이나 대접하고 내어줄 줄 아는 부드러운 기술이 필요한 사회에 살고 있다. 남성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전통적으로 배워온 남성성은 무너지고 있다. 남성 스스로도 남성성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며 변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변화가 두려운 것이다. ‘페미니즘’ 자체가 그들에게는 변하고 있는 이 세상과 자신들의 전형적인 성 역할에 대한 위기라고 여긴다. 그래서 남성들은 화풀이하듯 익숙하게 여성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너희 때문이야!’라고. 한국에도 대중에게 이러한 사회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성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릴 사람이 필요하다. 철학자나 문화평론가 같은 사람 말이다. 그렇게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나와 친한 미국의 한 철학가는 “현대 페미니즘에는 강한 여성과 강한 남성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강한 남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기꺼이 고민하고 바꿀 의지가 있는 남성이다. 여성들은 이미 여성성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하지만 남성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제 그걸 해야 할 차례다. 아마 좋은 롤모델이 없기 때문에 생긴 현상일 것이다. 남성들에게도 이해심과 배려심이 많고 상냥한 성격을 갖는 것이 곧 남성성을 잃는 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고 새로운 남성성으로 정의할 만한 롤모델이 필요한데 전 세계적으로 부족하다. 학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남자는 여자를 보호할 만큼 강인해야 한다’라고 배우지 않나. 학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여성들은 이미 여성과 여성성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정립했고, 심지어 끊임없이 수정해나가고 있다. 한국의 페미니즘에서는 ‘탈코르셋 운동’이 대두되고 있다. 나를 옭아맨 모든 여성스러운 치장을 그만둠으로써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성을 거부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탈코르셋’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긴 머리를 자르거나 가지고 있던 화장품들을 모아서 버리는 모습을 찍은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린다. 올바르고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자본주의에 더 많이 희생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화장품을 사거나 외양을 꾸미는 데 드는 돈이 어마어마하지 않나. 남성들중에서 화장품을 사용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탐폰부터 시작해 여성 위생용품에 쓰는 돈까지 다 더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은 돈을 쓰고 있다.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그렇다. 여성이 상업성의 노예가 된 또 다른 이유는 사회가 여성에게 외모에 대한 압박을 많이 주기 때문이다. 밖에 나갈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신경 쓰거나 그 시선에 부응하려면 어‘ 제 입은 옷을 오늘 입으면 안 되기’ 때문에 들이는 시간의 총량이 어마어마하다. 외출할 때의 내 모습이 예뻐 보이면 더 자신감이 붙는 것은 물론 이해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의식에서 ‘예뻐 보여야 한다’, ‘꾸며야 한다’라는 생각이 너무 커진 나머지 강박적으로 외모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탈코르셋 운동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문제적 이슈다. 일부에서는 탈코르셋을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그렇지 않은 페미니스트들을 비난하고, 탈코르셋을 하는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는 선크림을 바를지 말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펼친다. 소모적인 갈등이다. 여성들 스스로 여성들끼리의 차이점을 인정해야 한다. “저 사람은 페미니스트라면서 왜 화장을 해?”라는 식으로 먼저 판단을 내리면 남성들이 여성들의 외모에 대해 바보 같은 판단을 내리는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을 포용하며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고,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은 전혀 불필요한 갈등이고, 어떤 결과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빨리 이 시기를 벗어나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한국에는 또 하나의 케케묵은 논제가 있다. 지난달 낙태를 처벌하는 현행 형법이 위헌인지를 가리는 첫 공개 변론이 있었다. 여성들은 주말마다 광장에 나가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시위를 한다. 독일에서는 낙태가 합법인 것으로 알고 있다. 먼저 설명하고 싶은 건 낙태죄 폐지를 원한다고 해서 그 여성이, 또는 내가 낙태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낙태까지 가는 상황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다. 어떤 여성이 낙태를 하고 싶어 하겠나. 하지만 여성인 우리의 몸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한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낙태죄를 처벌하기 이전에 언제나 누구든 필요하면 피임약과 피임 도구를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인 장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사후 피임약 또한 필요하면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해서 원치 않는 임신 자체가 없도록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 피임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낙태를 허용하라는 입장에 대해 단순히 ‘그럼 당신은 아기를 죽이는 것을 옹호하느냐’ 같은 말을 하는 무지가 없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논의에서 교회는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 종교와는 무관하다. 종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으면 키울 수 없는 상황에서 입양을 보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엄마도 입양된 아이의 인생도 큰 시련과 비극의 연속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피임 도구와 피임과 관련한 성교육이 모두 무료로 제공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의 의식 제고도 당연히 뒷받침돼야 한다. 아이가 생기는 건 당연히 남성도 함께 한 일이지 않나. 그 상황에서 ‘임신은 저 여자가 했으니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피임과 안전한 섹스에 대한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현행법상 낙태죄로 처벌받을 경우 남성은 그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오직 낙태를 한 여성과 시술한 의사만 처벌 대상이다. 하하하. 여성을 동정녀 마리아로 보나 보다. 반대 세력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들인가?

종교 때문이 아니어도 보수적인 남성 가운데 무조건 ‘생명 옹호’를 외치는 사람이 많다. 그럴 때 여성들은 ‘그 생명이 바로 나’라고 대답하고 있다. 정확하다. 노령화 문제로 많은 국가에서 출생률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낙태죄를 통해 출생률을 높이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집어치워야 한다. 독일은 낙태 죄가 폐지됐지만 되레 출생률이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생후 6개월 이후부터 갓 돌이 된 아기를 아침부터 오후까지 무료로 보낼 수 있는 보육원의 역할이 크다. 워킹맘들이 일을 하면서도 육아를 할 수 있게 제도적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에 출생률이 올라가는 것이지, 낙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며칠간 서울에 머물고 있는데 당신이 만난 한국 여성들은 어떤가? 한국에 처음 왔기 때문에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여기 있는 동안 느낀 것은 한국 여성들이 무척 강인하고, 똑똑하고, 진화하려고 하고, 호기심이 많고, 영역을 확장하려는 욕구가 아주 크다는 것이다. 여성 영화제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스태프 대부분이 여성이라 한국 남성들과 대화해볼 기회가 없었던 건 조금 아쉽다. 한 가지 의아하다고 생각한 건 GV를 할 때 남녀 관객의 성비가 1:6 정도 되는데 이상하게 늘 첫 번째 질문은 남성들이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아직도 여성들이 대중 앞에서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여성 혐오자들과도 싸우지만 20~30여년간 이 나라에서 살며 사회적 통념에 익숙해진 자신과 싸우기도 한다. 탈코르셋도 해보고, 시위에 나가 다른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더듬더듬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향하고 있다. 평생 페미니스트로 살아온 당신에게 조언을 듣고 싶다. 역시 보수적인 독일에서 태어나 살면서 나 자신과도 싸워야 했다. 나는 그때 답답한 독일 사회가 싫어서 미국으로 갔다. 당시의 미국은 독일보다 여성의 권익이 10년 정도 앞서 있었고 그녀들이 쟁취한 것의 결과가 슬슬 보이는 단계였다. 여성 영화인도 많았고 학계나 각종 직업군에서 두드러지게 높은 자리에 여성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자매 같은 조력자들을 만나 힘을 얻었다. 더 많은 자유를 얻었고, 나를 더 강인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고 난 후 독일로 돌아와 보니 독일 사회도 그사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좀 단순한 답일지 모르겠지만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많이 다녔으면 좋겠다. 내가 속한 문화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의 여성들이 어떻게 권익을 찾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간 우리 안에서의 충돌이 얼마나 사소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 간의 대립이 아니라 여성 사이에서도 사회 계급 간의 차이와 갈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항상 중산층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페미니즘 운동을 해온 것이 아닐까? 아티스트 여성들에게만 통용되는 페미니즘은 아니었을까? 한곳에 오래 있다 보면 시야가 좁아질 수 있으니 시각을 넓혀 여러 사회적인 계급과 무리를 볼 수 있는 아량과 여유를 길러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여행을 넘어 그 나라에서 일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겉에서 보는 것과 실제로 느껴보는 것은 차이가 크니까. 지금은 페미니스트 네트워크가 잘돼 있으니 그와 연계해서 일을 해볼 수 있는 통로도 잘 마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