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공장 이용인 창업

도정공장 쌀가게 이용인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고래실논에서 키운 쌀을 수확한 뒤 당일 도정해 솥밥을 지어 먹는 느리지만 충만한 즐거움. 전자레인지에서 2분이면 밥 한 그릇이 나오는 시대에 도정공장 쌀가게를 연 이용인은 좋은 쌀이 주는 건강한 포만감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패션 사업을 하던 그가 고향의 쌀을 팔겠다고 나선 지 1년. 이천에 수시로 내려가 벼의 생장을 지켜보고, 매일 밥을 지으며 일일이 품질을 확인하는 수고 속, 그의 생활은 단순해졌지만 즐거움은 복잡다단하다.

태풍으로 안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피해는 없었나? 이천은 다행히 비켜갔다.

7월 둘째 주인 지금, 벼는 어느 정도 자라 있나? 4월에 볍씨 싹이 텄고, 지금은 50센티미터 정도 자랐다.

패션업계에 있었다고 들었다. 원래 파는 걸 잘한다.(웃음) 해외 직구로 시작해 이후 패션 브랜드 수입에 나서며 사업을 해왔다. 쌀가게를 시작한 뒤로 패션이 점점 재미없어진다. 패션이라는 그릇이 너무 작게 느껴진다. 음식은 가장 적은 액수의 돈을 내고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거니까. 명품백을 구입했을 때의 즐거움을 그보다 훨씬 적은 비용을 치르는 음식으로도 느낄 수 있는 거니까. 이렇게 깨끗하고 좋은 쌀을 팔면 사람들에게도 이롭고····. 무엇보다 정작 쌀이 있어도 농민들이 팔 곳이 없다. 오픈마켓을 많이 해봤으니까 처음에는 쌀도 그렇게 팔면 되겠다 싶어 시작했다.

판매 품목으로 쌀에 접근했다가 뒤늦게 깊이 빠진 케이스다. 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다 똑같겠지 싶었다. 그런데 쌀 종류에 따라 맛도 다르고, 같은 품종이라 해도 그해 날씨에 따라 매년 맛이 또 다르다. 그래서 지금 먹는 쌀을 다시는 못 먹게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런 재미가 있다. 이천에 자주 가려고 하는데 이번 주만 해도 세 번을 갔다(인터뷰를 한 날은 수요일이었다). 매주 화요일에는 이천시 농업대학에서 농사를 배우고 있다. 기본을 알아야 하니까. 농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쌀을 팔 수는 없지 않나.

‘하이아미’라는 품종이 낯설다. 일반 쌀에 비해 필수아미노산을 30퍼센트 이상 많이 함유한 종이다. 성장기 아이들 발육에 도움이 된다. 영양소가 많은 반면 열매가 적게 열려 마진율이 낮아 농부들이 잘 심지 않는 종이기도 하다. 찰기와 단맛이 적어서 볶음밥이나 스시 등으로 요리해도 좋다. 얼마 전 하이아미로 파에야를 만들어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라. 도정할 때마다 테스트를 하니까 밥을 많이 먹을 수 밖에 없는데 확실히 건강해지는 게 느껴진다. 아내도 나도 살이 좀 쪘다. 요즘 20대는 회사 다니기 너무 힘들고 바빠서 밥해 먹을 시간 없다 해도 30, 40대는 잘 챙겨 먹었으면 좋겠다. 몸이 달라진다.

웹사이트에 농부 사진과 이력을 소개해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농사는 아무래도 농부의 역할이 크다. 농부가 관리를 잘하면 가물어도 물이라도 더 대니까. 논에 자주 찾아가는데 우리 농부는 갈 때마다 논에 계신다. 그래서 우리 쌀밥이 다른 쌀보다 확실히 맛이 좋다. 최근 <리틀 포레스트>에서 봤는데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맛있다고, 알차진다고 하더라.

이천이라는 땅의 특수성도 좋은 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 같다. 이천 쌀이 맛있는 이유는 이천이 일교차가 크기 때문이다. 벼가 낮에는 내내 물을 흡수하고, 밤에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데 밤에 갑자기 온도가 낮아지면 그 운동이 더 활발해진다. 물도 깨끗하다. 이천이 고향인데 살고 있는 동안 홍수가 한 번도 안 났다.

도정공장 쌀가게의 셀링 포인트라 할 수 있는 당일 도정, 당일 배송이라는 컨셉트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부지런한 농부, 좋은 땅과 물, 날씨가 벼를 키워도 결국 도정해서 바로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품질과 품종도 중요하지만 밥을 지어보니까 도정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새것을 먹는 느낌이라 다 맛있더라. 일본에서 정미기를 들여왔는데 우리나라에 한 대 있는 기계다. 색을 구별할 수 있어서 검은 쌀을 골라내고, 동일한 크기의 쌀알을 선별한다. 쌀알의 크기가 고르니까 밥맛이 일정하다.

유통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지만 패션과 어떤 점이 가장 다른 것 같나? 위생과 청결을 가장 신경 써야 한다. 처음에는 제품 포장 후에 우리 집으로 택배를 계속 보내봤다. 배송 중에 변질되거나 파손되는 경우가 없는 지 미리 테스트해본 거다. 집에 매일 택배가 도착하니까 택배 기사님이 똑같은 걸 왜 매일 사느냐고 물어보더라. 또 포장에는 종이만 사용한다. 진공포장의 경우 비닐을 사용하지만 쉽게 분해되는 것 위주로 선택하고 있다. 음식이 비닐에 담겨 있는 게 꺼려지기도 하고.

지금의 새 일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인가? 자연을 자주 접해서 좋다. 오후 2시쯤이면 해가 쨍쨍한데 그때 시골에 가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따뜻하다. 물에는 소금쟁이들이 떠다니고 소쩍새 같은 새가 지저귀고····. 또 거기서 먹는 밥이 진짜 맛있다. 이천에서 맛집도 다니고, 도자기도 보고 너무 재미있다.

패션업계의 속도와 지금의 리듬이 확실히 다를 것 같다. 왜 그렇게 급하게 살았나 싶고, 물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 만나는 손님의 성향도 다르다. 지금은 고객들에게 연락을 자주 한다. 문자 메시지도 보내고, DM도 보내는데 소감이 정말 궁금해서다. 다 좋은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우리는 냉정한 이야기도 듣고 싶다. 얼마 전 5백 그램 포장 단위도 크다는 의견을 들었다. 2인 가족인데 남은 쌀을 처리하기 곤란하다고 해서 반으로 줄여볼까 생각 중이다.

덩달아 생활도 이전보다는 단순해졌겠다. 요리도 배우고 있다. 자꾸 먹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면 주부가 됐나 싶기도 하다. 뭐 하나 먹을 때도 제철 음식인지 생각하게 되고, 그런 게 더 중요해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