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둘이 놀걸 그랬어

몇 년 전까지 나는 대학 CC 출신의 30대 커플이었다. 우리 커플 주변에는 대학 동기와 선후배 지인이 가득했다. 둘이 놀다가 지루하면 대학 동문을 불러냈다. 오래된 CC의 장점은 오래된 지인이 많다는 점이다. 마치 그 옛날 대학 생활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과 비슷했다. 한 커플 주변으로 남자 둘, 여자 둘 정도가 더 붙어 하나의 그룹이 형성된다. 우리는 커플이라는 이유로 그룹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연말을 단둘이 보내는 게 심심할 만큼 사귀었기에 우리는 연말에는 그룹원을 모아 파티를 벌였다. 대단한 건 없다. 만나서 밥 먹고, 술 좀 마시다가 막차를 타고 헤어지는 스케줄이다. 대학 시절이었다면 첫차를 탔겠지만, 이제는 체력이 안 된다. 어쨌든 사회적 지위가 생긴 만큼 그해 연말에는 공간을 하나 빌려 파티를 하기로 했다. 자취방보다 더 고급스러운 공간을 빌렸다. 연말 단가로 하루 60만원 정도였다. 겉은 한옥이지만 내부는 모던했다. 막걸리나 소주가 아니라 와인을 마시고, 샴페인을 따고, 인스타그램 속 유명한 가게에서 공수한 케이크를 먹고, 또 근사한 요리도 해서 먹는 직장인들의 연말 파티였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인 모임이 아니었다. 모두가 직장인도 아니었고, 수입이 변변찮은 친구들도 있었다. 대학 시절에야 지갑이 얇아도 떳떳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누군가는 공간 대여료를 부담스러워하고, 비싼 와인을 보고 입을 다문 친구도 있었다. 누군가는 중국요리나 시켜 먹자고 주장했고, 케이크를 자르는 내내 투덜거리기도 했다. 우리의 대화는 종종 단절됐고, 적막은 음악만으로 채워졌다. 그룹은 소그룹으로 나뉘었고, 밖에서 담배를 태우고 오겠다던 누군가는 그길로 사라졌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할 이유도 사과할 대상도 없는 밤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지금도 연말이면 못 받은 숙박비가 종종 생각난다. 요즘에는 카톡으로도 이체가 된다는데.

 

크리스마스에 식당을 예약하는 법

이벤트에 자신이 없으면 유명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편이 낫다. <생생정보통>에 나오는 맛집 말고, 간판에 미슐랭 스타가 새겨진 레스토랑으로 가야 한다. 창의적인 음식과 우아한 분위기가 저녁 식사를 고급스럽게 만들어준다.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하면 이벤트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문제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은 별 대수롭지 않은 날에도 예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자리가 없다. 우리나라에 맛에 민감한 사람이 이렇게 많나 싶을 정도다. 크리스마스 한 달 전? 당연히 예약이 찼다. 한 달하고 일주일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지난해의 일이다. 12월 초에 한식을 창의적으로 해석한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작은 귀고리를 선물하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클래식한 다이닝이라고나 할까? 단정한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3만원짜리 실내 손 세차를 받은 쾌적한 차를 끌고 여자친구를 픽업해서 크리스마스 조명이 빛나는 서울 시내를 지나, 종로의 고즈넉한 골목에 내려 미슐랭 레스토랑으로 입장할 계획이었다. 젠틀한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근사한 풍경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애피타이저가 나오면 작은 쇼핑백에 든 귀고리를 선물한다. 귀고리는 결혼하자고 떼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다. 반지나 목걸이에 비하면 값도 저렴한 편. 선물을 하고, 여자친구의 답례품을 기다리다가 없으면 폰이나 만지작거리면 된다. 어쨌든 구성이 탄탄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 주 전에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만석이었다. 유명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들은 물론이고 호텔 레스토랑도 모두 예약 불가였다. 최소 11월 마지막 주에는 전화를 걸어야 구석의 2인석 테이블 하나라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작년에는 몰랐다. 다행히 내 책장 구석에 <미슐랭 가이드>가 있었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 버금갈 만한 식당도 만석이었다. 다음 페이지 맛집으로는 한식의 전통성을 내세운 냉면집들이 있었고, 이어지는 고깃집, 칼국숫집…. 기억해야 할 것은 고민이 길어질수록 예약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강남의 레스토랑으로, 또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게으른 내가 도착한 곳에는 성탄 선물을 받은 아이들의 함성만이 가득했다.

 

사랑보다 더 큰 피로

눈 내리는 밤, 창밖에선 캐럴이 들리고, TV에선 많은 아이돌의 춤과 노래가 생방송으로 송출된다. 온 세상이 들뜬 와중에 나는 매콤한 치킨을 시켜 상에 올리고, 맥주도 한 캔 딴다. 그리고 게임기 전원을 켜고 헤드셋을 쓴 다음 소파에 기대 컨트롤러를 조몰락거린다. 이 얼마나 완벽한 휴가인가. 신이 있다면 내 옆에 앉아 한 판만 하게 달라고 징징댈 것이다. 분명하다. 하지만 연애를 한다는 건 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환상과 쾌락을 포기하는 일이며, 공허함을 책임감으로 채운 후 호텔 숙박권을 예약해야만 한다. 하, 그래서 나는 강릉으로 갔다. 차 옆자리에 여자친구를 태우고 서울 양양 간 고속도로를 느릿느릿 이동했다. 여자친구가 뜯어 주는 쥐포를 먹으며 강릉에 새로 연 호텔이 얼마나 근사한지, 야경은 또 어찌나 아름다울지에 대해 듣다가 일찍 일어나 목욕 가운만 입고 일출을 보기로 약속까지 했다. 운전이라도 시원하게 했으면 조금은 신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끝없는 정체 구간을 지나며 평창쯤에 이르면 화가 척추에서부터 솟구친다. 등허리는 갑갑하고 몇 번이나 재생한 캐럴 리스트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내가 코를 곤다며 나무라는 여자친구는 자신이 코를 곤다는 사실을 알까? 조용한 차 안에는 여자친구의 우렁찬 숨소리만 가득했다. 우리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강릉에 도착했다. 호텔 침대에 누우니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내 척추가 중력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여자친구는 짐을 풀고 지금 나가야 한다며 재촉했다. 크리스마스의 밤바다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로맨틱한 신남성인 나로서는 당연히 이색적인 순간을 즐기고 싶었고, 휠체어라도 있으면 더 좋을 뻔했다. 발가락 하나 꼼짝하기 싫었으니까. 나는 남자친구의 책무를 다하기위해 그녀와 함께 밤바다를 걸었다. 해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재즈 버전의 캐럴이 흘러나왔다. 바다를 산책하는 커플이 몇몇 보였다. 그래서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나? 모래 위를 걸으며 상념에 빠졌다. 치킨도 맥주도 게임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인간은 왜 행복을 갈구하는가? 이제 방에 들어가면 무엇을 해야 하나? 여자친구가 야한 속옷이라도 준비했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옳지? 누워만 있고 싶은데…. 수평선에 걸린 고기잡이배의 불빛이 출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