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랑 연인 커플 커플여행

호구가 되기엔

페스티벌에서 첫눈에 반한 B는 그야말로 내 이상형이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연락처를 물어볼 용기가 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사귄 지 두 달쯤 됐을 때 여름휴가 기간이 다가왔다. 일에 치여 무작정 쉬고 싶었던 나는 태국 패키지 여행을 제안했고 B는 내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비행기가 포함된 패키지 비용은 내가 전부 지불하기로 했다. 나이 차가 많기도 했고 그리 부담되는 비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지에 도착 후 첫 일정은 이 패키지를 신청한 사람들과 오리엔테이션 겸 모여 함께 밥을 먹는 것이었다. B는 그들과 같이 밥 먹기 싫다며 둘이 다른 데서 먹고 오자고 했다. 그럴 수 있다. 나는 가이드에게 양해를 구하고 무리에서 빠져나와 다른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저녁에는 해변가의 칵테일 바에 갔다. 현란한 불 쇼를 즐기다가 문득 지갑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B에게 일단 먼저 계산하라고 했더니 “나 환전 안 했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이따 호텔 옆 환전소에 가서 환전하자고 했더니 B는 살짝 당황하며 지금 현금이 없어서 환전할 돈이 없다고 했다. 나는 맥주 한 잔을 B는 레몬 다이키리 3잔을 마셨지만 몇 푼 되지 않는 칵테일값 때문에 얼굴 붉히기 싫어서 일단 호텔에서 지갑을 가지고 와 계산했다. 다음 날은 호핑 투어를 마치고 한국 식당에서 삼겹살을 먹기로 예정돼 있었다. B는 이번에도 “여기까지 와서 웬 삼겹살?” 하며 현지의 해산물 식당에 가자고 했다. ‘이럴 거면 왜 패키지 여행에 동의한 거지?’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구글맵을 뒤져 근처의 맛있다는 해산물 식당에 갔다. 랍스터가 식탁에 놓이기 무섭게 B는 제일 큰 다리를 골라 자기 입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처음으로 B가 못생겨 보였다. 마지막으로 망고셰이크 한 잔 값까지(물론 B가 마신 것) 일정의 모든 비용을 계산하면서 B와 내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몇 주 후 둘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었고 그길로 나는 이별을 선언했다. B는 고작 이런 일로 헤어지느냐며 전화와 문자를 끊임없이 해댔지만, 글쎄 내겐 고작 이런 일이 아닌걸. S(디자이너, 38세)

 

너무나 많은 것을 원했던 거야

우리는 연인이 된 지 1주년을 맞아 도쿄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 나는 일본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기억 저편의 단어를 하나씩 끄집어내 일본어를 하는 재미에 빠졌다. 반면 남자친구 A는 일본어는커녕 영어도 잘하지 못했다. A도 처음에는 버릇처럼 먼저 나서려 했지만 성질 급한 내가 먼저 일본어로 치고 나가는 일이 반복되면서 점차 자신감을 잃은 것 같다. A는 지하철에서도 편의점에서도 아기 새처럼 나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보다 일곱 살 많은 사람이라 서울에서는 언제나 나를 아기처럼 돌봐주었는데, 여행 온 지 3시간 만에 A는 나에게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이 익숙지 않아 점점 불편해졌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이튿날 나의 일본어는 일취월장해 있었다. 마지막 날 저녁, 1주년을 기념해 특별히 예약한 프렌치 비스트로에 갔다. 원래 코스 요리라는 게 다음 요리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둘 다 그런 식사가 익숙지 않아 음식이 늦어질수록 우리에게 음식을 주는 걸 까먹은 게 아닌지 조금씩 불안해졌다. A는 “우리 음식 언제 나오느냐고 물어봐”라며 내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여행 내내 A를 건사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휩싸여 있던 나는 번번히 “스미마센”을 외치며 웨이터에게 음식이 언제 나오는지, 우리를 잊어버린 건 아닌지 물어봐야 했다. 손을 들 때마다 그 식당의 모든 사람이 우릴 쳐다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집에 가고만 싶었다. 유난히 길었던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A가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가자고 했다. 그렇게 들어간 편의점에서는 맥주 몇 개를 고르더니 컵라면 코너에 가서 하나하나 들어 이게 무슨 라멘인지 읽어보라는 게 아닌가. “나 한자는 잘 못 읽어. 그림 보니까 이건 쇼유라멘 같네.” 헤어짐을 망설이던 마음에 쾅쾅 느낌표가 찍혔다. 그렇게 우리의 1주년 기념 여행은 이별 여행이 되었다. 헤어지고 몇 달 후 A와 나 둘 다 아는 친구가 하는 말이 A가 여행에서 돌아와 친구들에게 내가 얼마나 외국어를 잘하고 똑똑한지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다고 한다. K( 약사, 29세)

 

사랑은 비행기를 타고

C와 사귀기 전부터 나의 뉴욕행은 결정돼 있었다. 급작스럽게 시작된 연애가 늘 그렇듯 불이 요란하게 붙었지만 그렇다고 1백50만원 상당의 비행기 티켓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혼자 뉴욕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C는 말도 없이 뉴욕으로 왔다. 첫날은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튿날부터 C에게서 이상한 징후를 발견했다. 장난기 많고 말도 많은 C가 급격히 다운돼 말수도 적어지고 차분해진 것이다. 뭔가 불편한가 싶어서 나는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C의 기분을 살폈고, 그렇게 며칠을 보내니 나도 조금씩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집 근처에서 아침을 먹던 때였다. 나는 아침을 먹을 때마다 오렌지 주스를 곁들이는데 잠깐 숙소에 다녀온 사이 주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커피가 있었다. 나는 날카롭게 “주스 안 시켰어?”라고 물었고 C는 곧바로 “언제 시키라고 말하고 갔어?”라고 답했다. 그동안 속에 쌓인 모든 것이 그 식당에서 폭발했다. 우리는 지난 며칠간 뉴욕에서 있었던 일을 넘어 서울에서 있었던 일까지 들먹이며 싸우기 시작했다. 둘 다 목소리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더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 전에 자리를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 일정은 모두 망쳤다. 혼자 있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그 넓고 낯선 뉴욕에서 혼자 갈 곳도 없었다.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건 C였다. 혼자 마트에서 싸구려 와인을 몇 병 사오더니 주섬주섬 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는 낯선 곳에 오면 항상 분위기를 파악하고 적응하는 시간이 얼마간 필요하다고. 나 역시 그간 느꼈던 서운함을 토로하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음 날부터 우리의 본격적인 뉴욕 여행이 시작됐다. 이 여행을 시작으로 런던, 도쿄, 통영까지 둘이 많이도 다녔다. 그리고 우리의 여행은 늘 숙소 주변을 천천히 산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와 달리 C에게는 새 도시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K(마케터, 3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