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넷플릭스 작품이 있다. 바로 지난해 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브리저튼>이다. 공개된 지 약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넷플릭스에서 ‘오늘 한국의 TOP 10 콘텐츠’에 자리하고 있다. <브리저튼>은 줄리아 퀸 작가가 쓴 ‘브리저튼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공작과 나(The Duke and I)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고 <그레이 아나토미>, <범죄의 재구성>의 제작진이 함께했다.

작품 속 배경은 미술과 건축을 비롯한 문화가 무르익고 무도회 등 사교의 장이 활발하게 펼쳐졌던 1800년대 영국의 리젠시 시대다. 그 안에 벌어지는 여성들의 ‘결혼 경쟁’과 복잡하게 얽힌 사랑의 관계가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두 주인공인 다프네 브리저튼과 사이먼 헤이스팅스가 육체적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여주는 ‘고수위 장면’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양한 상황에 놓여 있는 여성 캐릭터 또한 <브리저튼>에서 눈에 띄는 점 중 하나다. 결혼이 개인은 물론 가정과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작품 속 세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여성 캐릭터들을 소개한다. (아직 작품을 보지 않았다면 ‘스포’를 주의할 것.)

다프네 브리저튼

“오로지 결혼, 그 한순간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기분 말이야.
난 그걸 위해 길러져 왔어.
이게 내 전부고 유일한 가치야.
결혼을 못 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돼.”

브리저튼 넷플릭스 드라마 영국 여성

LIAM DANIEL/NETFLIX © 2020

<브리저튼>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다프네 브리저튼은 높은 권위를 가진 브리저튼 자작 가문의 네 번째 자녀이자 맏딸이다. 그는 런던의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왕비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최고의 신붓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로 간택된다. 사교계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된 그는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남편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데, 친오빠 앤소니의 간섭과 빠르게 퍼지는 ‘가십’ 때문에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이후 그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이먼 헤이스팅스 공작을 만나 ‘계약 연애’를 시작한다. 다프네의 목적은 지위 높은 남성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려 다른 이들의 관심을 얻는 것.

권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다프네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꿈꾼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과 다프네의 차이점을 꼽자면, 다프네는 자신의 소신과 판단을 따른다는 것이다. 다프네는 프러시아 왕자의 총애를 받아 청혼을 받기 직전에 이르지만, 결국 헤이스팅스 공작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이어나가며 사랑이 주는 육체적, 정신적 행복에 집중한다. 가정과 사회가 정해놓은 암묵적인 결혼관 대로 살아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행동하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해나간다.

레이디 댄버리

“나도 언젠가는 빛으로 나가야 하는 걸 알았지.
무서워해도 안 돼서 대신 내가 무서운 사람이 됐지.
갈고닦은 재치와 옷맵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무장해
어딜 가든 사람들이 제일 겁내는 존재로 거듭났단다.”

브리저튼 넷플릭스 드라마 영국 여성

LIAM DANIEL/NETFLIX © 2020

다프네의 상대 역할로 등장하는 사이먼 헤이스팅스는 사교계에 데뷔한 여성들의 어머니로부터 ‘일등 신랑감’으로 꼽힌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사이먼은 어린 시절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의 친구인 댄버리 여사 밑에서 자란다. 아버지를 향한 증오를 갖고 있는 그는 ‘비혼’을 선택해 헤이스팅스 가문의 대를 끊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그의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한 댄버리 여사는 혹독한 귀족들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치장하고 내면을 단단하게 가꾼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도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사이먼과 다프네의 관계가 위험에 닥쳤을 때 현명하게 조언을 하기도 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니지만, 사이먼의 인생에 큰 도움을 주며 어머니의 역할을 자처한 그는 여러 자녀를 낳아 기르며 이들의 성공적인 결혼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다른 어머니들과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엘로이즈 브리저튼

“어째서 여자의 선택권은 꽥꽥대다 정착하거나 둥지에 남는 것뿐이야?
내가 날고 싶다면?”

브리저튼 넷플릭스 드라마 영국 여성

LIAM DANIEL/NETFLIX © 2020

다프네의 여동생인 엘로이즈는 <브리저튼> 속 여성 중 가장 진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브리저튼 가문의 다른 자녀들과 달리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고, 결혼이 아닌 대학 공부를 하고 싶어 한다. 늦은 밤 몰래 밖으로 나와 흡연을 하는 모습도 여러 번 등장한다. 시대가 바라는 여성이라기보다는 성별로 인한 사회적 제한과 차별에서 벗어나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고, 결혼 등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행복을 얻기보다는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개척해나가려고 한다.

엘로이즈가 이 작품에서 맡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레이디 휘슬다운’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다. 레이디 휘슬다운은 런던 사교계의 주요 사건이나 소문을 일종의 주간 신문처럼 만들어 배포하는 미지의 인물이다. 실제로 <브리저튼>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내레이션을 따라 전개되기도 한다. 그는 사교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간파하고 있는 휘슬다운이 과연 누구인지 끊임없이 추리하며 주변 사람들을 의심한다. 반면 결혼을 제일 중시하는 다른 여성들은 오로지 휘슬다운이 전하는 소식에만 주목할 뿐이다.

페넬로페 페더링턴

“철들 나이고 사교계에도 나갔어.
그래서 더 중요한 어른의 걱정거리가 있다고.
결혼 같은 거. 네 이해는 바라지도 않아.
그런데 모두 너 같은 미인은 아냐.”

브리저튼 넷플릭스 드라마 영국 여성

LIAM DANIEL/NETFLIX © 2020

엘로이즈의 절친한 친구로 페더링턴 가문의 셋째 자녀인 페넬로페가 있다. 그는 브리저튼 가문의 아들 콜린을 짝사랑하는데, 어느 날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사는 친척 마리나가 콜린과 결혼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리나가 콜린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할 때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고, ‘콜린의 나이는 아직 결혼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하며 둘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는 마음을 은근히 내비치기도 한다.

페넬로페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을 한 가지 꼽자면 통통한 체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미인이 아니라는 점과 결혼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날씬해 보이기 위해 신경 쓰는 수많은 여성 사이에서 그는 당대의 사회가 규정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작품 속에서 분명하게 자신만의 매력을 드러낸다.

마리나 톰프슨

“아무도 저를 도와주거나 대안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전 결혼해야 했고
행복의 가능성을 보여준 남자는 당신뿐이었어요.”

브리저튼 넷플릭스 드라마 영국 여성

LIAM DANIEL/NETFLIX © 2020

페더링턴 가문의 저택에 살고 있는 마리나 톰프슨. 그가 나이 어린 콜린과 급히 결혼을 하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임신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있는 군인인 조지 크레인과 사랑을 나눠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페더링턴 부인은 마리나가 조지를 무작정 기다리지 않고 런던에서 결혼하길 바란다. 그리고 페더링턴 부인이 쓴 조지의 ‘가짜’ 이별 편지를 받은 마리나는 부인과 함께 자신의 결혼에 박차를 가한다. 서두르다 보니 노인의 부인이 될 상황에 놓이기도 하지만, 콜린을 만나 서로 호감을 느끼며 그의 청혼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브리저튼> 속 여성들에게는 결혼 전 남성과 섹스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프네의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다. 다프네는 사이먼과 결혼하기 전까지 성적 쾌락이나 이를 통해 아이가 태어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와 사이먼이 어두운 밤에 정원에서 키스를 나누자 그의 오빠인 앤소니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이먼에게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한다. 이처럼 여성의 성관계에 대한 규제가 심한 사회에서 마리나는 아버지 없는 자녀를 가지게 된 셈이다. 미혼모 그리고 여성을 바라보는 오늘날의 인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샬럿 여왕

“현명하군.
아니면 결혼 생활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우정이라는 사실을 아는 흔치 않은 행운아거나.”

브리저튼 넷플릭스 드라마 영국 여성

LIAM DANIEL/NETFLIX © 2020

시청자의 후기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브리저튼>의 특징 중 하나는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인종 차별이 만연하던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다룬다는 점과 함께 살펴보면 파격적이라고 느껴질 법도 하다. 그중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샬럿 왕비가 대표적이다. 샬럿 왕비는 실제로 영국 리젠시 시대에 존재하던 인물인데, 조지 3세의 부인이었던 그가 혼혈이라는 가설이 제기된 바 있다.

<브리저튼>에서는 왕비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인물들 중에서도 동양인을 비롯해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자리한다. 댄버리 여사의 말에서 그 배경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왕이 흑인인 샬럿 왕비와 사랑에 빠졌기에’ 검은 피부를 지닌 이들이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고 밝힌다. 결국 <브리저튼>은 성별과 인종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낸 어떠한 기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INSTAGRAM @bridgertonnetflix

한편, 1월 22일 <브리저튼> 공식 인스타그램에 레이디 휘슬다운이 쓴 것으로 예상되는 글이 공개되었다. 글에는 <브리저튼> 두 번째 시즌의 공개가 예고되었다. 시즌 2는 브리저튼 가문의 첫째 아들인 앤소니를 중심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오페라 가수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던 그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기대해봐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