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은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빠르게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안심의 한숨을 그리고 고뇌의 한숨을 내뱉는 이들이 있겠죠. 최예다운, 그녀를 보면 자신의 피부를 뜯어내야만 했던 작가 ‘하이디 부허’가 생각납니다.
단단했던 어떤 곳으로부터 탈피를 시도했을 그녀는 삶 곳곳에 선명하게 뜯어낸 자국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남긴 허물처럼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이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다운 님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2020년 8월. 비가 억수같이 내렸던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사지는 억제대로 고정되어 있었고, 제 기도 안에는 인공호흡기가 삽입되어 있었어요. 죽음과 삶이라는 경계에 7일 동안 의식이 없다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다시 생이라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 저는 깨달았어요. 불의의 사고로 죽기 전까지 내 삶에서 그 누구도 내게 상처 줄 수 없다고. 그리고 깨달았어요.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시간이었다는 것을요. 그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싶어 제 삶 중 흘러가는 모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뿐입니다.
저는 다운님을 보면 카멜레온이 떠올라요. 간호사, 작가, 배우 등 다양한 카테고리 속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뭐랄까요, 카멜레온 같은 모습을 갖추면서도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는 아주 매력적이신 분 같아요.
성인이 되고 10년 동안 많은 일들을 하면서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에요. 20대 중반엔 스스로를 혐오하기도 했죠.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무모하게 도전했던 것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고, 지금을 나를 증명해 내었죠. 유명한 대학병원의 간호사도,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작가도, 유명한 작품을 찍은 배우도 아니지만 어떤 일을 하던 그 결과값을 기대하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할 때의 내 모습 그리고 스스로를 증오했던 시간들을 인정해가며 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거짓말을 하면 결국 들키는 게 싫어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면 타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내 모습을 잃지 않게 되는 거 같아요.
생생하게 피어오르는 삶을 사는 20대들에게 말씀 주실 수 있는 것들이 있을까요?
사소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보관하세요. 자신의 인생에 의미 없는 시간들은 없습니다. 지치기만 해 포기하고 싶었던 하루도 있을 테고 매일 무의미하게 반복하기만 한 하루들도 있을 테지만 그 시간들을 견뎌 마침내 이겨낸 지난 내 모습을 돌이켜 봤을 때 내 삶의 롤 모델은 지난 젊은 날 나 자신이 될 테니까요. 모진 비바람을 이겨내고 기꺼이 부질없는 땅에 뿌리를 내디딘 씨앗은 그 누구도 베어갈 수 없는 하나뿐인 나의 나무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다운님의 어떤 부분은 동트기 전 새벽녘 같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모두가 그렇듯.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숨기고 싶은 슬픔이 있잖아요. 그렇지만, 이 시기를 담대히 이겨내신듯한데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나 이유 같은 게 있을까요?
스스로를 증오했던 그 시기에 치료의 부작용으로 몇 년의 기억을 잃었어요. 내가 나를 증오했다는 벌로 나를 증명하고 싶었던 그 기억들을 빼앗아 간 건가 하며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신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내가 제일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 2019년~2020년도의 기억의 대부분이 삭제되었고 여전히 그때의 사진과 글을 봐도 기억이 떠오르지 않지만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마음에는 남아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담대히 이겨낸 건지 버텨낸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확실한 건 제가 포기하지 않게 늘 곁에 있어준 가족들과 친구들의 존재가 상실이 슬픔이 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주었던 거 같아요.
20대를 지나온 이 시기 최예다운님이 가지고 있는 판타지라고 할까요? 동화 속 주인공 같은 환상들 혹은 어린 시절부터 아직 품고 있는 꿈같은 것들이 있을까요?
20대는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어요. 그 진리를 20대가 끝나가는 지금에서야 깨달은 게 참 애석하지만 제가 앞으로 살아갈 30대, 40대도 무모하게 도전해 보고, 때론 실패를 맛보았지만 늘 그렇듯 씩씩하게 일어나고 싶어요. 이게 어떻게 판타지가 될 수 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실망하는 부분이 도전보다는 포기와 수긍이 내게 덜 상처를 준다며 용기에 뒷걸음치는 내 모습이라는 거에요. 서른이 되면 다운이도 철들겠지”라며 우스갯소리를 내뱉는 어른들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20대의 무모했던 제 모습을 30대에도 이어가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
마지막 질문이 될듯싶어요. 다운 님이 쓰신 글 중 가장 사랑하는 문장 한 구절 읋어주실 수 있을까요?
“가끔은 아직도 새벽에 잠 못 이룰 때면,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그때의 사진들을 뚫어져라 보곤 한다.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누워 그 기억들을 찾기 위해 매일 밤 나와 싸우는 시간들 난 하루 끝에도 치열하게 나를 지키는 고요한 전쟁을 치른다. 그리고 끝끝내 기억해 낼 것이고 그것들을 지키며 살아갈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자는 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