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티 페리

케이티 페리

1984년 10월 25일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출생,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방송인, 기업인이다. 케이티 페리는 2000년대에서 2010년대에 엄청난 인기를 누린 하이틴 팝의 여왕, 캘리포니아 걸이다. 데뷔 이래 9개의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을 포함한 다양한 히트곡들을 배출해 현재까지 누적 1억 3,500만 장에 달하는 싱글 판매고를 올렸으며, 이는 빌보드 싱글 차트 기준 역대 25위에 해당한다. 또한 미국 음악 산업 협회의 가장 높은 다이아몬드 싱글 인증을 취득한 여가수이다. 또한, 최다 조회수 순위에 오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뮤직비디오 조회수를 소유하고 있다.


케이티 페리 데뷔 전

케이티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본인 혼자 집에 남고 가족이 다 외출했을 때 노래를 배우고 있는 언니의 카세트를 몰래 훔쳐 들으며 노래를 연습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친구네 집에서 우연히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퀸의 Killer Queen이었다. 이 노래는 케이티 페리가 태어나서 처음 들은 팝송이었으며 이후 케이티는 본격적으로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모님은 케이티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녀에게 기타를 사주거나 보컬 트레이닝이나 댄스 레슨 같은 것을 시켜줬고 그녀는 15살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음악의 길로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특히 스티브 토마스와 제니퍼 렙의 눈에 띄어 테네시로 이동하여 음악공부를 계속하기로 한 것이 고등학교 자퇴서를 내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2001년 17살에 본명인 케이티 허드슨(Katy Hudson)으로 CCM 앨범을 냈으나 극도의 저조한 판매량만 기록했고 심지어 얼마 후 레이블도 같이 망했다. 판매량은 100장에서 200장 정도. 후에 남은 재고를 처리하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케이티 페리 팬들의 희망 소장품 1순위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1집이 그렇게 망하고 케이티는 CCM 가수가 아닌 팝스타로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17살에 다시 캘리포니아 LA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국 배우 케이트 허드슨(Kate Hudson)과 이름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혼전 성인 Perry를 따 케이티 페리(Katy Perry)라는 예명을 지었다.

당시 케이티는 프레디 머큐리 외에도 앨라니스 모리셋에 푹 빠져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LA에 오자마자 앨라니스 모리셋의 3집 앨범 프로듀서였던 글렌 발라드의 스튜디오에 무작정 찾아가서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다. 글렌 발라드는 그 당돌한 모습을 보고 그녀를 제자를 받아들이고 그녀와 계약해줄 레코드 레이블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간 곳은 아일랜드 레코드였고 2005년에 앨범이 나올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레코드의 사정으로 레이블에서 잘리고 앨범 발매가 무산되었다.

그 후 두 번째로 계약을 한 곳이 콜롬비아 레코드였는데 이때 콜림비아 레코드의 관계자들은 케이티의 앨범이나 컨셉을 당시 잘 나가고 있던 에이브릴 라빈 스타일로 정해주려고 했다. 심지어 에이브릴 라빈의 1집 프로듀서였던 매트릭스를 섭외해서 케이티랑 활동하게 했다. 그러자 케이티는 “나는 ‘케이티 페리’지, 제2의 누군가가 아니다.”며 에이브릴 라빈 스타일로 가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이렇게 갈등이 계속 고조되면서도 콜롬비아 레코드는 케이티가 나중에 엄청난 대스타가 될 것을 예상하고 케이티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했으며 케이티가 다른 회사에 가는 걸 절대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녀와 관계자들과의 의견 충돌로 케이티는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나오게 된다. 그 당시 음악 스타일 같은 경우 현재와는 곡들의 분위기 자체가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캐피톨 레코드와 계약을 하는데, 캐피탈 레코드에서는 전 회사들과 다르게 그녀의 음악과 컨셉을 존중하고 그녀가 원하는 스타일로 가자고 하였다. 그리고 앨범의 프로듀싱을 닥터 루크와 맥스 마틴에게 맡기는 등 그녀에게 최고의 작업진을 섭외해주며 엄청난 푸쉬와 지원을 해주기 시작한다.

많은 팬들이 케이티 페리의 데뷔가 너무 늦지 않았냐며 좀 더 일찍 데뷔를 했으면 어린 나이의 케이티를 볼 수 있었을 거라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케이티가 2000년대 초에 데뷔했다면 정말 제2의 에이브릴 라빈이 되어서 묻혔을지도 모른다. 무명시절 당시 케이티가 만들었던 비공개 노래들을 들어보면 다 어둡고 칙칙한 노래들이었다. 지금같이 밝고 명랑한 이미지의 케이티의 노래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케이티 페리 정규 음반

2008

1집 One Of The Boys

2010

2집 Teenage Dream

2013

3집 PRISM

2017

4집 Witness

2020

5집 Smile


케이티 페리 내한

2018

4집 투어 Witness: The Tour의 일환으로써 고척 스카이돔에서 첫 내한 공연이 진행되었다.


케이티 페리 출연 영화

2011

더 스머프

2012

케이티 페리: Part Of Me

2013

더 스머프 2

2015

더 스머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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