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한 김강우

작정한 김강우

차가운 듯 따뜻하고, 담담한 듯 살가웠던 김강우는 잠시 잊어도 좋다. 그는 작정한 사람처럼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 왕이 돼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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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티셔츠 티 바이 알렉산더 왕(T by Alexander Wang), 브레이슬릿 잔클레(Zancle).

조선시대의 가장 나쁜 악당은 누굴까? 죄질로 보나 지명도로 보나 아무래도 연산군, 장녹수, 장희빈 이상이 없을 것 같다. 자동적으로 연인이었던 연산군과 장녹수는 조선시대 최악의 중범죄자 커플인 셈이다. 파란만장하기로도 조선시대 톱클래스인 두 사람의 삶은 숱한 창작자들을 자극해왔다. 장르를 넘나드는 많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재해석되면서, 둘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간 망종의 표본 같은 존재로 온 국민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장녹수의 악행이 최고 권력자의 총애에 힘입어 극단적인 신분 상승을 이룬 여자의 비뚤어진 한풀이라고 한다면, 연산군의 폭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낳는다. 시대를 거스르는 분방함과 폭발적인 에너지의 소유자였던 연산군은 당연하게도 많은 남자 배우들에게 언젠가 나를 찾아왔을 때 도저히 거절할 수는 없을 것 같은 마력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리스신화나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할 법한 굴절된 내면, 현대적 상식과 윤리로는 결코 있을 없는 일들을 있는 대로 저질렀던 ‘문제적 인간’ 연산군과 김강우가 만났다. 영화 <간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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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네크리스 프리카(Frica).

김강우에게서 연산군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건 쉽지 않다. 연산군이 뿜는다면, 김강우는 품는다. 그가 연기해온 인물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쉽게 자신의 분노와 속내를 분출해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감정을 드러낼 때조차도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이기보다는, 마지막 한마디를 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상 살면서 자기 감정을 확 드러내고 폭발시키는 순간을 다 합해봐야 한 시간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런 게 스트레스잖아요. 참아야 하는 거. 저도 다혈질이지만 내색을 많이 하면서 살지는 않아요. 다들 그러지 않아요? 저는 그게 리얼리티라고 생각해요. 사극은 거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에요. 이번 작품 하면서 그게 되게 좋았어요.(웃음)”

절제된 내면은 그의 연기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실제 모습에서도 감지된다. 소리 내서 웃고 있는데도 정적이다. 침울한 것과는 다르다. 김강우한테는 쉽게 들뜨거나 끓지 않는 사람의 정제된 다부짐 같은 게 있다. 부패한 관리를 암살하는 무사 역할이면 또 모를까, 민규동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당신한테 연산군이 되라고 한 거냐고 물었다.

“저도 왜 나한테 이 캐릭터를 주셨는지 의아하긴 했어요. 아마 저 같은 사람이 하는 게 더 재미있다고 느끼신 것 같아요. 술자리에서 나를 택한 이유가 뭐냐고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감독님이 술을 안 드세요.(웃음) 영화 <결혼전야>를 같이 한 홍지영 감독님이랑 지방으로 무대인사 다니면서 수다 떨다가 나중에 무슨 캐릭터 해보고 싶으냐는 말에 연산군을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민규동 감독님이랑 부부시잖아요. 작품 준비하면서 그 얘기가 나왔던 모양이에요. 그게 계기가 됐나? 아무튼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그런 욕망이 있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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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팬츠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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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 셔츠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팬츠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네크리스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그와 만난 건, 첫 시사회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김강우 자신도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많은 배우들이 보여준 연산군과 김강우의 연산군이 어떻게 다를지, 우리 둘 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실제 인물이잖아요. 다들 폭군으로 알고 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봤고, 여러 배우들이 연기해왔고. 당연히 부담감을 느꼈죠. 내가 작품에 엄청난 누를 끼칠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이건 파고 팔수록 뭐가 나와요. 감자밭에서 감자 캐듯이 무궁무진하게 나오는 재미가 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완벽하게 갖지 않으면 백전백패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욕을 많이 먹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방 하나를 일주일 정도 빌려서 나오지 않고, 밥도 거기서 먹고, 빛도 차단하고 거기서 살았어요. 술도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시계도 없는 데서 미쳐가는 거죠. 작품 하면서 처음으로 전지 몇 장을 벽에 붙여서 설계도를 그렸어요. 생각나는 대로 연산군에 관해 이것저것 쓰고, 사진도 붙이고 하는 거죠. 범인 쫓듯이. 그러다 한계에 부딪혔고, 그다음부터 차라리 편해졌어요. 젠장, 걔 사는 거 본 사람 아무도 없잖아? 직접 만나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내 식대로 연산군이 된 거죠.”

작품 끝나고 여행 한 번 다녀오면 싹 리셋돼 대사 하나까지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이번엔 좀 다르다. 연산군을 추적하면서 만들었던 연기 설계도는 버리지 못한 채 돌돌 말아 보관해놓았다.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게 딱 한 번만 꿈에 나타나달라고 속으로 연산군을 불렀고, 평소에는 잘 듣지도 않으면서 혼자 있을 때는 우울한 음악을, 현장에 나갈 때는 펑키한 음악을 들었다. 이랬다저랬다 미친놈처럼 구는 연산군이 되려고 그랬다. 김강우는 정말 연산군이 되고 싶었다. 김강우의 연산군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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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트 릭 오웬스(Rick Owens), 티셔츠 티 바이 알렉산더 왕(T by Alexander Wang), 나뭇잎 모티프 링 프리카(F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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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트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슈즈 처치스(Church’s).

“자기 욕망대로 살았고, 시 잘 쓰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예술가 기질이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왕이 될 사람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지. 유교 문화 잣대로는 미친 인간인 거고. 옆에서 자꾸 찌르니까 엇나가고 폭군이 됐지만, 그것도 폐위되고 신하들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 꾸며낸 부분이 많아요. 연산군의 눈빛은 포악스럽지 않아요. 장난감 던져줬을 때 아이같이 재미가 들린 눈이지. 당하는 사람은 미치는 건데, 연산군한테는 그 순간이 재밌거든요. 후반부로 갈수록 브레이크가 고장난 사람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자신이 가진 모든 감성을 하나도 절제하지 않고 다 표현하고 사는 사람.”

인터뷰가 끝나고 영화가 공개됐다. 인터넷에는 생각보다 노출 수위가 훨씬 높다는 기사부터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에로틱하다고 할 만한 장면은 없다. 살색과 핏빛으로 가득한 화면에는 섹스도 없다. 거기에는 가학적인 게임과 살아남기 위한 욕망, 공포심, 권력에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진짜 대단한 건 온몸을 던진 배우들이다. 수없이 망설이고 몰래 울었을 것 같은 지독한 노출과 설정을 감수한 여배우들도 놀랍지만, 그만큼 대단한 건 김강우다. 이 영화를 보고 성적 흥분을 느낀 관객이 있다면, 자신의 성적 취향이 건강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발가벗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연산군을 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건 가장 부끄럽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희화화된 인간의 모습을 볼 때의 모멸감과 불쾌감이다. 나쁜 놈, 웃긴 놈을 택하는 것과 우스운 놈이 되는 건 많이 다를 것이다. 옷 벗고 설치는 연산군은 우습다. 조소하게 만든다. 게다가 그게 연기든 뭐든 옷을 벗는 행위가 얼마나 인간을 연약하게 만들지 생각한다면 김강우의 노출 신은 참 지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 김강우는 어떻게 봤을지 궁금해졌다. 후회는 없을 것 같다. 헤어지기 전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재미없었어요. 그냥 이건 오래 하지는 못하겠다는 생각? 현장 나가는 것도 좀 싫었지만, 흥미롭지 않았죠. 미치게 재미있다는 사람, 어릴 때부터 꼭 연기하고 싶었다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배우를 평생 하고 싶고, 너무 소중해요, 하는 사람들 보면 가식덩어리, 그렇게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그랬던 게 다행이에요. 어느 순간 배우를 당당하게 직업으로 인정하는 순간이 오면서 흥미가 생긴 것 같아요. 저는 연기가 좋아서, 영화가 좋아서 연기해요,가 아니라 저는 돈 벌 수 있어 해요, 거길 넘어가니까 다음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 그게 몇 년 안 됐어요. 아, 이게 소중하구나, 재미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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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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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키코.

키코를 만난 건 일본 최대 연휴인 골든 위크가 한창인 일요일 아침이었다. 촬영 전날 매니저는 드라마 촬영이 5시간 이상 지연돼 그녀가 잠을 제대로 못 잤을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키코는 후지TV의 <마음이 부서지네요(心がポキッとね)>라는 드라마에서 스토커 기질이 있는 데다 정서가 매우 불안정한 ‘미야코’란 인물을 연기하고 있다. 이 역은 키코가 처음으로 맡은 주인공이다.

“이번 역할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 주변엔 절대 없었으면 하는 캐릭터예요. 이런 친구가 있으면 무척 귀찮고 짜증스러울 것 같아요. 미야코의 불안정한 성격은 외로움에서 비롯되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고, 자신을 컨트롤하고 싶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 데서 오는 외로움이요. 다소 과장된 캐릭터이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이런 외로움과 갈등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보리 셔츠, 와이드 데님 팬츠 모두 비아플레인(Viapl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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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소매 화이트 티셔츠에 몸에 꼭 맞는 데님 쇼츠, 발목까지 올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