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훈의 출발

오승훈의 출발

오승훈의 출발

오승훈의 출발

오승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배우라는 새로운 길의 출발선에 섰다.

티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티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아홉 살 고든이 있다. 다른 동네에서 전학 온 외톨이 아이는 어느 날 자신에게 먼저 다가온 친구에게 마음을 열고 의지한다. 그렇게 열아홉 살이 되어 친구들과 만든 밴드에서 이상하다면 이상하고,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가사를 쓰지만 고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에게서 밴드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는다. 결국 그는 불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연극 <나쁜 자석>은 자신과 같은 자석에 다가가기 위해 자석의 성질을 스스로 버리고 마는 나쁜 자석의 이야기다. <피고인>에서 악역의 오른팔인 ‘석이’를 연기하며 크지 않은 역할로 의외의 존재감을 보여준 배우 오승훈이 나쁜 자석, ‘고든’을 연기한다. 오랫동안 믿어 의심치 않던 농구 선수라는 길을 접고, 선수 시절의 승부욕과 오기로 배우의 길에 접어든 그는 이제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중이다.

드라마 <피고인>은 막 끝났지만, 연극 <나쁜 자석>은 계속하고 있다. 점점 활동 반경이 넓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스물한 살에 연기를 시작했으니 20대 중반이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준비한 시간이 꽤 길었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 것 같다. 다양한 작품의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오늘처럼 인터뷰도 하며 활발히 움직이는 지금의 나 자신이 반갑고 숨 쉬는 것 같다. 지금껏 내가 해온 일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되기도 한다.

원래 농구 선수였다. 오랜 시간 하던 일을 접고 완전히 새로운 일을 준비 하며 보낸 시간은 혼돈의 시기였을 수도 있겠다. 연기를 전공하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보다 좀 더 탄탄하게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구를 그만두긴 했지만 운동하면서 생긴 오기와 승부욕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10년 넘게 농구 선수를 꿈꾸며 살아왔는데 부상으로 관둬야 했다. 농구 선수로 탄탄한 길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밑바닥을 경험하게 됐다. 10년 이상 꿈꿔온 일에서 실패를 겪으며 느낀 패배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연기를 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배우고 준비한 것 같다.

또다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두렵다. 아마도 실패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실패라는 게, 말하자면 노이 로제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쁜 자석>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바쁘게 지내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도 된다. 여전히 오디션을 열심히 보러 다녀야 하고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 계속 연기를 해야 하니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뿌듯하고 행복하다.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은 연극의 매력으로 관객과 호흡하는 점을 많이 꼽는데 어떤가? 그런 점도 물론 매력적이지만 연극은 상대 배우와 함께 만들 어가는 느낌이 더 강하다. 드라마는 여러 차례에 걸쳐 끊어서 촬영하지만 연극은 두 시간 넘도록 한 번에 이끌어가야 한다. <나쁜 자석>에는 내가 연기 한 ‘고든’의 독백 장면이 나오는데 대사 분량이 A4 용지로 다섯 장에 달한다. 나로서는 큰 도전이었다. 처음에는 잘할 수 있을지 두려웠지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극은 항상 도전하는 기분이 든다.

 

재킷과 팬츠 모두 코스(Cos), 스니커즈 컨버스(Converse)
재킷과 팬츠 모두 코스(Cos), 스니커즈 컨버스(Converse)

연극 공연과 드라마 촬영이 겹치는 기간이 있었으니 신인 배우로서 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많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쁜 자석>의 ‘고든’을 완벽하게 준비해놓으려 했다. 툭 치면 바로 고든이 나올 수 있도록. <피고인>의 ‘석이’는 현장에서 많이 배우며 만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둘 다 욕심만큼 잘해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나쁜 자석>만 하고 있는 지금은 더 집중력을 가지고 조금씩 다른 연기를 해보기도 하고 그런다. 그런데 <피고인>과 함께 할 때에는 정해진 틀에서만 연기하려 했던 것 같다.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내가 준비한 걸 마음껏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더블 캐스팅이나 트리플 캐스팅인 경우가 많다. 배우의 색깔에 따라 캐릭터가 달라지는데 오승훈의 고든인 ‘훈고든’은 어떤 색을 지녔나? 소심한 고든을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고독하다고 해서 늘 주눅 들어 있는 건 아니니까. 아홉 살의 외톨이 고든에게 친구들이 놀자고 했을 때 결국 자기 의지대로 간 것이 아닌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혹은 사랑스러움을 담아내고 싶었다. 캐릭터에 확신이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확신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이 대단히 잘나지도 않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명확하게 답할 수 없다. 지금은 연기를 하면서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함께 연기하는 배우와 감독, 작가, 선배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답을 찾는 중이다.

농구 선수를 관두긴 했지만 농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농구를 예능으로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겠다. 전혀. 십 몇 년에 걸친 농구 인생이 헛 되지 않도록, 그 기억을 좋게 간직하라고 선물로 받은 기분이다.

원치 않는 이유로 미래의 방향이 바뀌었으니, 인생에서 사고를 당한 느낌이었을 것 같다. 부상 때문에 농구를 관두고는 온 세상의 분노가 다 내 것인 것만 같았다. 유망주였을 때에는 모두가 나를 환영했는데, 부상을 당하니 인사조차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추락한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머니 덕 분에 힘을 냈다. 어머니가 고깃집을 운영하는데 영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지셨다. 고깃집이 육체적으로 무척 힘든 일이거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욕심이 생기는 장르나 캐릭터가 있나? 연극 <렛미인>부터 <나쁜 자석>, 드라마 <피고인>과 올해 개봉할 영화 <괴물들>까지 색깔이 강 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기회가 된다면 좀 더 나다운 역할을 하고 싶다. 청춘 드라마 같은. 실제의 나는 밝고 장난도 많이 치고, 또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도 지금껏 많지 않은 작품에서 어둡고 무거운 역할에 캐스팅 된 건 운동을 관두면서 쌓인 고독함과 외로움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때 겪은 그런 감정들이 지금은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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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교환

꿈의 교환

꿈의 교환

꿈의 교환

극 중 제인은 텅 빈 눈으로 말한다. “개 같은 인생, 뭐 하러 혼자 살아.” 구교환은 이 영화를 어떤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냐는 물음에 ‘이 대사에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다.

재킷 와이엠씨(YMC)
재킷 와이엠씨(YMC)

“제인을 얘기할 때 항상 조심스럽다. 너무 좋은 인물이나 너무 좋은 것에 대해서 얘기할 때, 그걸 해칠까봐 두려운 느낌이 있지 않나. 그런 거.”

인터뷰를 잘 마친 후 구교환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서면으로 다시 보내왔다. 혹시 자신의 답변이 부족하다면 정리해서 글로 다시 보내겠다 했던 참이었다. 서면으로 작성한 답변은 얼굴을 보고 나눈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조금 더 명확하게 쓰여 있다. 구교환은 인터뷰 내내 “제가 말을 잘 못하죠” 하며 초조해했었다. 구교환은 두 번 세 번 생각하는 사람, 나는 한 번 생각하는 사람일 뿐인데.

배우가 기억에 남는 것은 비단 역할의 경중이나 외모처럼 단순한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분위기는 한 사람이 살아온 발자취가 만드는 것. 그런 면에서 구교환은 쉬이 잊히지 않는 분위기와 눈빛을 가졌다. 그를 처음 본 사람은 처음 본 대로,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스크린 속 구교환을 좇게 된다. 5월 말 개봉을 앞둔 영화 <꿈의 제인> 에서 구교환은 트렌스젠더 ‘제인’ 역을 맡았다. 이 영화로 그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 이민지와 함께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꿈의 제인>은 집을 나와 ‘팸’을 이룬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그 아이들을 이끌며 보호하는 제인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인물이 되어 불행으로 점철된 이 세상을 헤매는 사람들의 손에 ‘함께’라는 작은 의미를 쥐여준다. 극 중 제인은 텅 빈 눈으로 말한다. “개 같은 인생, 뭐 하러 혼자 살아.” 구교환은 이 영화를 어떤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냐는 물음에 ‘이 대사에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다.

 

코트 헥시코 바이 아이엠샵(Hexico by I Am Shop), 셔츠 와이엠씨(YMC), 팬츠 민즈와일 바이 오쿠스(Meanswhile by OHKOOS), 스니커즈 아식스 타이거(Asics Tiger).
코트 헥시코 바이 아이엠샵(Hexico by I Am Shop), 셔츠 와이엠씨(YMC), 팬츠 민즈와일 바이 오쿠스(Meanswhile by OHKOOS), 스니커즈 아식스 타이거(Asics Tiger).

시나리오 받고 가장 깊이 와 닿은 부분이 있었다면? 시나리오 중간 중간의 여백이 좋았다. 포즈라던가 대사가 없는 부분들. 슬랩스틱처럼 보이기도 하는 제인의 행동이 다소 무겁고 힘이 들어가 있는 제인의 대사를 중화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이 재밌어 보였다. 좋아하는 장면을 하나 꼽자면 제인이 처음 등장해 “안녕, 돌아왔구나” 하고 첫 대사를 하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소현(이민지)에게 하는 말이지만 관객에게 건네는 인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렌스젠더 중에도 배우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 감독이 왜 구교환에게 이 역할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왜 캐스팅되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떤 이유든 그것을 아는 순간 알게 모르게 그 이유에 갇혀서 표현하게 되더라. 다른 작품 얘기인데 내 찡그리는 미간이 좋아서 캐스팅했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연기할 때 자꾸 미간을 찌푸렸다.

쉽게 만나기 힘든 역할이다. 준비 과정이 달랐나? 준비 과정에서 여느 인물과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섭식 장애를 겪는 제인의 상태를 보여 주기 위해 촬영 전까지 6개월 동안 몸을 만들고 유지해야 했다. 그때는 굉장히 원망스러웠다. 사실 더 어려웠던 건 정서적인 부분이다. 처음엔 레퍼런스를 찾아보려다가 이 역할에 어떻게 레퍼런스가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보통은 연기할 때 레퍼런스를 먼저 찾아보나? 아니다. 대부분의 역할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역할을 선택하거나 극에 참여할 때는 내가 맡을 인물이 궁금한가 아닌가가 기준인데 제인은 너무나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겼다. 제인이란 인물을 ‘만들었다’는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제인을 얘기할 때 항상 조심스럽다. 너무 좋은 인물이나 너무 좋은 것에 대해서 얘기할 때, 그걸 해칠까봐 두려운 느낌이 있지 않나. 그런 거. 감독님이랑 상의할 때도 실제로 제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나를 맞추려 했다.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처럼 제인의 대사들에는 대부분 힘이 들어가 있다. 감독의 메시지를 가장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인물로 보이는데, 그런 제인의 세계관에 얼마나 공감했나. 촬영 내내 제인 같은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종본에서는 삭제 되었지만 제인이 죽어가는 금붕어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 살려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대사가 있었다. 어느 하나, 어떤 누구도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제인의 마음을 사랑한다. 연기를 하면서는 꼰대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좋은 말만 자꾸 하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제인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라 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중계하듯이 이야기하니까, 그런 면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당신에게도 제인 같은 사람이 있나? 제인은 인물로 다가올 수도 있고 공간일 수도, 반려견일 수도 있다. 어떤 형태로든 순간순간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내 주변에 참 많은 제인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추상적으로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어, 제인 같은 사람이야!’ 하기보다는 제인 같은 순간들, 제인 같은 장소. 이렇게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 같다. 나 스스로 제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느 역할이든 연기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지만 제인은 특히 내게 큰 영향을 줬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제인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선물 같은 사람.

 

재킷, 팬츠 모두 컬러/비콘 바이 아이엠샵(kolor/BEACON by I Am Shop), 티셔츠 반스아웃피터스 바이 오쿠스(Barns Outfitters by OHKOOS).
재킷, 팬츠 모두 컬러/비콘 바이 아이엠샵(kolor/BEACON by I Am Shop), 티셔츠 반스아웃피터스 바이 오쿠스(Barns Outfitters by OHKOOS).

연출도 하고 있다. 배우일 때와 감독일 때, 각각 어떤가? 연기를 하면 프로덕션이 끝나고 후반 작업에 배우가 참여할 일이 거의 없다. 자연스레 오랜 시간 떨어져 있다가 극장에서 선물처럼 재회하는 기쁨이지. 감독으로 참여하면 상영할 때까지 내내 지긋지긋하게 붙어 있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드는 매력이 있다. 촬영 소스를 가지고 편집하고 호흡을 조절하고 색 보정으로 색을 불어넣는 일련의 후반 작업을 좋아한다. 툴 다루는 것을 놀이처럼 여긴다.

영화 말고 다른 분야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모두 알다시피 연기 분야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굳이 장르를 분리하고 싶지 않다. 전력에 보탬이 되는 역할이고 작업이라면 언제든 감사하다.

또 준비 중인 작업이 있나? 이옥섭 감독과 공동 연출한 서울환경영 화제 트레일러의 후반 작업 중이다. 천우희 배우와 이주영 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가족이 된다는 것’을 주제로 한 단편영화다. 이옥섭 감독과 공동 연출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하는 장편영화 ‘청년 프로젝트’의 촬영도 앞두고 있다. 작년부터 쓰고 있는 ‘앙팡테리블 프로젝트’의 시나리오 작업도 같이 이어나가고 있다. 말하고 나니 세 작품 모두 이옥섭 감독 과의 공동 작업이다.

메이트 같은 건가? 우리끼리는 혼성 듀오라고 한다. ‘비쥬’ 같은.(웃음)

<꿈의 제인>을 어떤 사람들이 봤으면 하나? “개 같은 인생, 뭐 하러 혼자 살아” 하는 대사에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봐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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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진다움

연우진다움

연우진다움

연우진다움

삶을 대하는 연우진의 태도는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다. 자신을 찾기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깨닫고, 깨닫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가장 연우진다운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연기라는 멋진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 자신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스스로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어서인지 항상 기쁘고 즐거워요. 그 호기심으로 늘 깨닫는 삶을 살고 싶어요.”

스트라이프 셔츠와 블랙 쇼츠 모두 라프 시몬스 바이 10꼬르소 꼬모 (Raf Simons by 10 Corso Como).
스트라이프 셔츠와 블랙 쇼츠 모두 라프 시몬스 바이 10꼬르소 꼬모 (Raf Simons by 10 Corso Como).

연우진을 만난 건 <내성적인 보스> 촬영이 끝난 지 보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몇 달간 살아온 ‘은환기’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었고, 그때의 감정이 쉬이 사라지지 않아 다른 작품을 마쳤을 때보다 유독 더디게 연우진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직 ‘환기’에 빠져 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발버둥 치듯이 화보 촬영을 한 것 같아요.” 아직 환기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진 못했지만 드라마 <7일의 왕비>로 새로운 옷을 입을 준비를 시작했다. 첫 촬영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나눌 순 없었지만 커다란 틀은 로맨스라고 한다.

“로맨스 작품 속 저를 많은 분들께서 좋아해주시지만 그 자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고민을 늘 해요. 물론 특정한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뜻대로 되진 않지만요. 그런데 어느 순간 자연스러운 만남이 찾아오기도 하더라고요. 올해 세 편의 영화, <사선에서> <더 테이블> <궁합>이 개봉해요. 이 영화들에서 익숙하지 않은 저를 만나실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올해가 기대되는 이유죠. 그러고 보면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순간 잃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이건 열심히 하면서 깊은 생각과 철학이 쌓여갈 때 기쁨을 느껴요. 앞으로도 로맨스가 아닌 더 다양한 색을 입게 된다면 좋겠지만 지금의 저다움을 잃지 않고 연기하며 꿋꿋이 가보려고요.”

 

데님 티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데님 티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포즈가 다이내믹해서 의외였다. <내성적인 보스> 방송 전에 했던 화보 촬영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드라마 방영 직전이어서 캐릭터에 온전히 빠져들지 못해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약간 들뜬 상태로, 스스로를 좀 더 자유분방하다고 느끼며 촬영했다. 사실 오늘 스튜디오에 오면서 걱정했다. 드라마가 끝난 지 2주 정도 되어가는데 아직 은환기라는 캐릭터와 그때의 추억들이 남긴 잔상에 여전히 취해 있는 중이라 화보 촬영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검은 옷을 많이 입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이렇게 밝은색 옷을 입었는데 낯설지 않았다. 화보 촬영 덕분에 어두운 톤의 은환기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 같다. 기분 좋은 작업이었다.

작품을 끝낸 후 연기한 캐릭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편인가? 보통은 작품이 끝나면 고향인 강릉에 가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번엔 내려가지 못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뭔가를 하려 하지 않고 일상을 보내면서 생각이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가장 중점을 둔 것이 나 자신을 버리는 일이었다. 몸에서 힘을 최대한 빼고 내 안의 많은 것을 비워내려 했다. 작품이 끝나고 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원래는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기 좋아하고 여행도 떠나곤 하는데, 이번엔 여운이 길어서인지 오히려 뭘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환기를 준비하며 왜 자신을 비우려 한건가? 처음에는 내성적인 은환기와 나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자꾸 뻔한 부분이 부각되며 재미없게 느껴졌다. 말수를 줄이고 정적인 모습만 표현하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란 사람과 캐릭터의 공통점을 찾지 않고 그냥 나를 비우기로 했다. 그래서 애써 뭔가를 찾으려 하지 않고 음악을 들으며 혼자 많이 걸었다.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일상의 나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니까 어느 날 은환기가 나에게 탁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신기했다.

 

스트라이프 슬리브리스 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데님 오버올 노앙(Nohant).
스트라이프 슬리브리스 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데님 오버올 노앙(Nohant).

왜 그렇게 열심히 걸었나. 처음엔 살을 빼려고 매일 1만5천보 이상 걸었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보고 사람을 구경하며 걸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중독이 되더라. 그리고 자연스레 환기에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작품 때문에 살을 빼긴 했는데 지금의 상태가 썩 나쁘진 않다. 오히려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할까? 상쾌하기도 하고 몸이 가벼운 느낌도 좋고 머리가 맑아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적당한 예민함이 생긴 것 같아 좋다. 오감이 자극된달까.

예민함이 독이 되기도 한다. 장단점이 있겠지. 일단 연기할 땐 좋다. 그런데 이런 예민함에 빠져 있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지 못할 때가 있더 라. 너무 나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드라마가 ‘소통’에 관해서 얘기하는데 정작 나 자신은 주변 사람들과 소통을 잘 하지 못한 것 같다. 미안하기도 했고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하더라. 하지만 지루한 일상에서는 이 예민함으로 스스로가 더 풍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일을 하고 있구나’, ‘내가 어딘가에 빠져 있구나’라는 생각에 기분도 좋았다.

드라마는 한 회 방송이 끝나면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온다. 그 반응을 보며 16부를 끌어가야 하는데 <내성적인 보스> 시청률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서 배우로서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삶의 철학이기도 하고 똥고집이기도 한데,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편이다. 모든 일 는 이유가 있을 테니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그런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는 않는데 그래도 처음 겪어본 일이긴 했다. 나다움으로 그런 것들을 덜 어내기 위해 애를 썼던 것 같다. 일희일비하기보다는 큰 그림 속에 이 작품이 높은 완성도로 끝까지 유지하려면 우리의 길을 정확하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무사히 끝냈고 촬영 내내 아등바등하며 이를 악물고 연기했다. 함께 연기한 동료 배우들과는 오히려 더 잘 뭉쳤다. 촬영장의 우리는 뜨거운 용암같이 들끓었다.

이번 작품이 자신에게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무엇일까? 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연기를 하며 늘 성찰의 시간을 갖는데 이번 작품만큼 이렇게까지 자학하며 성찰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지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했지만 사실 많이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또 다른 내 모습을 보았고, 몰랐던 예민함을 찾았으며, 연기 하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인간 연우진과 배우 연우진 모두 한 단계 더 깊어진 것 같다. 지칠 때마다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로부터 큰 힘을 얻었다. 내가 환기에만 빠져 있을 때 주위에 늘 함께 연기하는 배우가 있었고, 이 사실이 매우 안심이 되는 순간도 있었다. 나보다 어린 배우들이었지만 그들로부터 얻는 에너지가 정말 컸다. 그 에너지가 내 안의 어떤 것을 끄집어내는 큰 동력이 되었다. 연기란 함께해야 한다는 것, 작품이란 함께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예술이라는 걸 알았다.

 

네이비 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핑크 수트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스니커즈 폴 스미스(Paul Smith).
네이비 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핑크 수트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스니커즈 폴 스미스(Paul Smith).

작품 하나하나를 해낼수록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있을 것 같다. 또는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잃고 싶지 않은 신념도 있을 테고. 연기를 할수록 나만의 고집이 생겨 때론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 잃고 싶지 않은 가치관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나만의 방법이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느 상황에서나 느긋하고 긍정적으로 대처하고 순리에 맡기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내 삶을 더 부드럽게 해주는 것 같다.

긍정적인 당신에게 가장 큰 역경이 있었다면 언제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아버지와 이별했을 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자 가장 친했던 친구고 내 인생의 롤 모델인 사람과 이별하는 그 순간이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항상 느끼고 있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기를 계속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아버지는 내게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어 마음 속 어딘가에서 항상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지금도 기쁜 일이 생기면 아버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어느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실지 떠올려본다. 그 선택이 옳았을 때는 아버지가 도와 줬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주 한잔 하면서 기쁨을 나누고 싶다.

얼마 전 공식 SNS에 드라마를 하면서 그린 그림 한 장과 함께 드라마를 끝낸 소감을 남겼다. 처음엔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연필을 깎아 소감을 적고 사진을 찍고 나니 끝까지 내가 아닌 은환기로 작품을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을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드라마에서 집에 혼자 있는 장면이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그곳이 굉장히 편하고 안락하게 느껴지더라.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16부까지 촬영이 끝나고 나니 그림이 완성되었다. 마음 가는 대로 그린 그림이지만 그 속에는 농촌에서 보내는 안락한 시간이 담겨 있다. 편안하게 누워 자연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모습 같기도 하고. 의도한 그림은 아니었고 손이 가는 대로 자연스레 그렸다. 언젠가 산과 바다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은 꿈이 있다.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이 좋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여행을 많이 다녀서 지금도 그런 곳을 찾으려 하는 것 같다.

 

데님 티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데님 롱 재킷과 쇼츠 모두 J.W. 앤더슨 바이 톰 그레이하운드 (J.W. Anderson by Tom Greyhound), 스니커즈 반스 어센틱(Vans Authentic).
데님 티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데님 롱 재킷과 쇼츠 모두 J.W. 앤더슨 바이 톰 그레이하운드 (J.W. Anderson by Tom Greyhound), 스니커즈 반스 어센틱(Vans Authentic).

연기 말고 나를 뜨겁게 하는 것이 있나? 재미없게 들리겠지만 아직 없다. 가끔 나조차 연우진이라는 사람이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뜨거운 뭔가를 하고 싶은데, 그래서 늘 찾으려고 하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많은 것을 해보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시간이 후회될 때도 있어서 앞으로는 좀 더 용기를 내볼까 한다.

뜨거운 뭔가는 무엇이 될까? 록을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 그 취향을 잃어버리고 살았다. 록 음악에 재능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즐기기 위해 용기를 내볼까 한다. 언젠가는 취미로 밴드도 해보고 싶다. 그럼 나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것 같다.

하루에 1만5천보씩 록 음악을 들으며 걸었겠다. 아니. 트로트 들었다. 트로트의 구성진 리듬감에 몸이 반응했다. 나훈아 선생님 노래를 많이 들었다. 색달랐다. 새로운 것들이 유독 눈에 많이 들어온 때였기 때문이었을까?

 

배우 연우진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최종 목표라기보다는 늘 깨달음이 있으면 좋겠다. 인간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관심사일 수도 있고. 깨닫기 위해 움직이고, 그러면서 성숙하고 단단해지고 싶다. 연기가 되었든 다른 무언가가 되었든. 물론 그 범주 안에 연기는 늘 함께하면 좋겠다.

대답할 때 늘 명확한 단어를 선택하려는 것 같다. 단어 선택이 문과보다는 이과생 같다. 그런가? 이과 출신이긴 하다. 연기를 전공한 게 아니라 토목과를 전공했으니. 대학에서 진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어렸을 때는 수동적으로 살았는데 스무 살을 지나면서 그동안 참아온 것들이 터져 나왔다. 물론 선택의 두려움도 있었다. 운 좋게 배우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순간순간의 연결 고리가 잘 맞아떨어졌다. 군대를 비교적 일찍 다녀온 편인데 그때 정말 영화에 미쳐 있었다. 그래서 제대하자마자 배우가 되고 싶은 의지가 불타 올랐다. 그 의지에 스스로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냥 흘러가버릴 수도 있던 시간인데 이렇게 좋은 흐름이 되었다.

인터뷰를 즐기는 편인가? 오늘 아주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이런 내가 어색하다.(웃음) 인터뷰는 정말 어렵다. 내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메일을 보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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