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나아갈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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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주영은 한계를 두지 않고 스스로를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볼 생각이다. 영화 <야구소녀>의 주수인처럼.

베스트 마조네(Ma Journee).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로 분류됐다. 1996년, 규약에서 이 문구가 사라진 뒤 여자도 프로야구 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야구소녀>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문구다. 규약은 바뀌었지만 프로야구에서 여성이 맞닥뜨리는 벽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그 벽을 뛰어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야구소녀>의 ‘주수인’이다. <야구소녀>는 고교 야구팀의 유일한 여성이자 ‘천재 야구 소녀’라 불리는 그가 프로야구 팀 2군에 입단하기까지 겪는 고군분투를 그린다. 언뜻 보면 마치 주수인의 성공 서사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의 힘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에 있다. 영화는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남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공정
하게 능력을 평가받고자 하는 ‘평등’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여자 화장실 한 칸을 로커룸으로 써야 하는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물론, 당장 누군가에게는 주수인의 바람이 그저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주수인을 보며 꿈을 키워온 ‘또 다른 주수인’의 등장으로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변화의 파도는 갑작스레 일지 않는다. 그저 아주 작은 물결에서 시
작된다.

놀랐다. 여성이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없던 시절이 있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알았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최윤태 감독님이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실 때 실제 모델이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프로야구 팀에 입단한 안향미 선수다. 수인은 영화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자 프로야구 선수는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힘든 일들을 겪는데. 여자 화장실을 로커룸으로 쓰는 에피소드도 실제 선수가 겪은 일이라고 한다. 감독님과 안향미 선수의 인터뷰를 들으며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었고, 그래서 캐릭터를 완성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게다가 <야구소녀>는 단지 야구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야구를 넘어 작품이 던지는 평등에 관한 질문은 현재 우리 세대가 갖는 의문과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추위와 사투한 점 외에는 재미있게 작업했다.(웃음)

한 달 동안 야구단에서 생활하며 야구를 배웠다. 실제로 느낀 한계가 있는가? 사실 야구에 대해 잘 몰라서 레벨 0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전에 감독님이 주신 자료를 보며 공부하고 실제 야구 경기를 보면서 투수들의 폼도 꼼꼼히 살폈다. 특히 한 달간의 훈련 동안에는 모든 구종을 연습했다. 극 중에서 수인이가 직구 대신 너클볼을 던진다는 건 굉장히 큰 의미인데, 공을 던지는 원리나 룰, 경기 운영 방법 등 야구 전반에 대해 배웠고, 완벽하게 마스터한 건 아니지만 최대한 원하는 구종에 가깝게 던져보려고 노력했다. 물론 겨우 한 달간 훈련하면서 일생을 야구에 바친 선수들과 비슷하게 던지겠다는 건 오만한 생각이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매일이 내 몸의 한계에 도전하는 나날이었는데, 훈련하면서 조금씩 실력이 느니까 욕심이 나긴 하더라. 옆의 선수가 부럽고 질투도 나고.(웃음) 이런저런 과정을 겪으며 ‘수인이가 야구 팀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겠구나’ 싶었다. 캐릭터에 다각도로 다가갈 수 있는 경험이었다.

주수인이라는 인물에게서 어떤 매력을 느꼈나? ‘꿈’이라고 하면 막연하고 무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고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행복’이란 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걸 이룰 때 쟁취할 수 있지 않나. 수인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외압의 방해를 받을지라도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단단함을 가진 인물이다. 이런 작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배우 이주영은 어떤가. 한계에 부딪혀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 사실 연예인이나 배우라는 꿈이 처음에는 마냥 무모해 보일 수 있지 않나. 꿈을 키우며 ‘내게도 한 방이 있을까?’, ‘내가 이렇게 계속 한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지레 겁을 먹거나 한계를 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직 해볼 때까지 다 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단편영화나 독립영화를 찍을 때, 상업 드라마나 영화에 진출해 조금씩 나를 보여주기 시작할 때도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이제 30대에 접어드는데,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믿어보려고 한다. 주변에서 하는 조언이나 이야기가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결국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나 자신이니까.

영화 속 수인처럼 여성이라는 이유로 편견을 마주한 적이 있나? 대한민국을 넘어서 이제는 세계적으로 여권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편견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임금만 봐도 명확히 차이가 나지 않나. 다만 이런 양극화를 막기 위해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의 문제를 넘어 소수 계층이 부당한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지점에서 배우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배우는 작품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야구소녀>의 주수인 역시 소수자인데, 그들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하는 게 배우의 일차적인 역할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관객이 이런 작품을 보면서 공감하고 자신과 동일시할 수도 있을 테니까.

영화에서 수인이 싸우는 건 세상의 편견만이 아니다. 이제 그만 야구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엄마(염혜란)와 벌이는 모녀 간의 갈등도 등장한다. 수인과 엄마의 관계에서 가장 중점에 둔 건, 엄마가 (관객에게) 미움받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글러브를 불에 태우는 에피소드가 표면적으로는 모녀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눈 때이기도 하다. 어쩌
면 누구보다 엄마가 수인이를 이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후에 든든한 조력자가 되는 최 코치(이준혁)도 마찬가지다. 수인이 혼자 모든 걸 헤쳐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최 코치, 엄마, 아빠(송영규), 친구들(곽동연, 주해은)의 도움도 필요했다는 걸 보여준다.

엄마와 수인이 글러브 때문에 싸우는 장면을 보며 많이 울었다. 특히 엄마가 “나라고 이러고 살고 싶은 줄 알아!” 하고 외치는 장면에서. 주체적 여성상인 수인과 남편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어머니가 대비된다. 실제로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설계할 때 10대의 여성상은 수인이를 통해, 20~30대의 여성상은 김선생(이채은)을 통해, 40~50대의 여성상은 엄마 캐릭터에 투영하고 싶어 하셨다. 한 지붕 아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각자 처한 현실이나 고민이 다르고 희생하고 포기해야 하는 것도 다르다. 크게 보면, 다양한 삶 속의 개인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 지켜보고 응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수인은 볼을 던질 때 손톱이 상하는 걸 보호하기 위해 매니큐어를 바른다. 그리고 이를 궁금해하는 동생에게 이렇게 답한다. “예뻐지는 게 아니라 단단해지는 거야.” 수인의 성장을 관통하는 인상적인 대사다. 나 역시 그 대사를 좋아한다. 그리고 수인이 프로 선수가 아닌 프런트(운영 조직)를 제안받을 때 구단 단장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도 무척 소중하게 느껴진다. “야구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으니,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다” 하고 외칠 때 마음이 많이 아팠다. 결국 프로야구 팀 2군 선수로 계약을 하지만 “앞으로 더 힘들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듣게 된다. 다만 후반 장면에서 수인이는 이미 단단하게 성장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사 프로 팀 선수가 될 수 없었을지라도 수인이는 괜찮을 거라고. 지금까지 이런저런 일을 겪는 과정에서 밴 굳은살이 있으니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안도했다.

셋업 수트 지방시(Givenchy),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레더 톱과 팬츠 모두 디올(Dior),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푸시버튼(PushButton), 팬츠 인스턴트펑크(Instantfunk), 슈즈 코스(COS).

배우 이주영은 주수인만큼이나 ‘단단하다’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배우다. 그럼에도 나약해지는 순간이 있나?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다만 ‘나는 약하지 않다’고 스스로 되뇌면서 내가 하는 말 자체에 용기를 얻을 때가 있다. 그리고 약해진다기보다 겁이 나는 순간도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작품의 첫 촬영이라든지.(웃음) 연기는 공부와 달라서 내가 어느 정도까지 준비해야 이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하고 해낼 수 있을지 알아채기가 힘들다. 나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과연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을지 고민될 때 가장 무섭다. 하지만 현장에서 나를 도와주는 많은 사람의 에너지에 다시금 기운을 얻곤한다.

관객의 반응이 두려울 때도 있을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은 관객이 완성한다고 하는데,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 당시 관객의 반응은 어땠나? 원래 작품이 공개된 뒤 관객의 피드백을 찾아 보는 걸 좋아한다.(웃음) 주수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현재의 삶, 지금 하고 있는 일, 꾸고 있는 꿈에 ‘그래도 된다’는 당위성을 인정받은 것 같다는 게 주된 평이었다. 수인이와 나이가 비슷한 10~20대는 물론이고 우리 부모님 세대도 수인을 보며 다시 꿈을 찾았다고 했을 때도 정말 기분이 좋았다. 어떤 때는 ‘꿈’이라는 단어가 무모하고 막연해 보이지만,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단어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내가 맡은 역할이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를 줄 수도 있다는 걸 이번 작품을 통해 가장 많이 느꼈다.

그동안 다양한 인물을 연기했는데, 비교적 ‘주체적인 캐릭터’라는 공통된 결이 있다. 이것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 중 하나인가? 꼭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의 의견이 없고 수동적인 인물 역시 캐릭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에도 존재하니까. 다만 많은 배우들이 이야기하듯, 한 작품 안에서 남성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과 여성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몇 년 전만 해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런데 지금은 상업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주체적인 인물로 볼 수 있는 여성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 주수인 역시 그렇고. 그럼에도 나는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저런 여성 캐릭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데?’라는 말을 앞으로도 많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고정관념을 깨는 캐릭터가 실제 삶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은가? 너무나. 그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맡았던 역할들에 동기화되면서, 삶에서 주저하지 않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배우고 있다.

최근 인터뷰에서 “2020년을 기점으로 연기 인생이 환기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올해 어떤 변화를 겪었나? 어떤 사건이 있거나 분명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자연스레 생긴 변화다. 매년 만나는 작품과 캐릭터도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 삶의 가치관도 조금씩 달라지는데, 불과 2~3년 전만 해도 ‘이런 역할은 내가 할 수 없을 거야’ 하고 판단하는 일이 많았다. 주관이나 신념
이 확고한 대신, 어느 부분에서는 마음이 닫혀 있었던 것 같다. 그 폭을 점점 넓히려고 꾸준히 노력한 과정에서 생긴 변화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마리끌레르와 인터뷰하며 ‘중심을 잘 잡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도 잃고 싶지 않은 배우 이주영의 중심은 무엇인가? 내가 맡은 역할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연기를 하든, 일상을 살아가든 언제나 그 무엇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향했으면 좋겠다.

이주영의 다음 목표는 무엇이 될까? 어떤 작품이 끝나면 이후에는 어떤 역할을 맡아보고 싶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답이 없다.(웃음) 왜냐하면 앞으로 만날 모든 역할이 내가 해보지 않은 캐릭터일 테고 이전에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과 작업하게 될 테니까. 작품의 결은 비슷할 수 있지만 어떤 캐릭터도 완전히 똑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다음 작품으로 또 야구선수 캐릭터를 제안받는다고 해도 그건 수인과 다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척 많을 거라 믿고, 그때그때 맡은 역할을 잘해내려고 한다.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현재를 치열히 사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일 것이다. 그래서 앞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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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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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 있는 진짜가 되는 것. 배우 엄태구가 잘해내고 싶은 그 연기.

신작 <낙원의 밤>이 2020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그 반응을 느끼지 못해 아쉬울 것 같아요. 박훈정 감독님의 작품인 데다 시나리오도 워낙 재미있어서 결과물이 좋을 거라는 기대는 있었습니다. 제목도 아주 멋지고요. 제아무리 낙원이라도 밤이 되면 그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시적인 제목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더 베니스에 가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어쩔 수 없죠.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낙원의 밤>에서 ‘태구’를 연기했다고요. 저도 신기했어요. 감독님이 저를 생각하고 써주신 줄 알고 황송한 마음이 들었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냥 이름을 태구로 지은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엄태구가 아니라 박태구였습니다. 영화 속 태구는 한마디로 쫓기는 인물이에요. 어떤 일로 검은 조직의 타깃이 되어 제주도로 도망간,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연기했습니다.

태구라는 인물이 품은 감정은 무엇인가요? 아픔, 허망함, 자책 이런 것들이 생각납니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신세계> <브이아이피> <마녀> 등 박훈정 감독의 전작에 나오는 인물들을 참고했나요? 감독님의 전작은 모두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작품들이지만 <낙원의 밤>을 준비하면서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만 집중했습니다. 반대로 촬영하면서 감독님을 알게 되고 다시 보니 전작들이 새롭게 느껴지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어요. 촬영장 숙소에서 우연히 영화 채널을 통해 <마녀>와 <신세계>를 다시 봤는데, 이‘ 장면에서 이런 생각을 하셨겠구나’, ‘이 현장에서는 이러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 재미있는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감독님이 되게 멋있어요. 감독님 덕분에 촬영하면서 좋은 경험을 많이 했어요.

배경이 제주도였어요. 누아르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풍광을 가진 곳이잖아요? 저는 아주 좋았어요. 사실 현장에 가면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제주도는 숙소에서 현장을 오가며 일출과 일몰을 보는 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지치고 힘들었던 그날의 피로가 녹는 기분이 들었어요.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제주도에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음식도 맛있고, 커피가 맛있는 카페도 많았어요. 아이스 바닐라 라테.(웃음)

<낙원의 밤>을 찍던 당시의 기억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힘들지만 아름다웠다. 아이, 죄송합니다. 너무 오그라드네요.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일도 많았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 설레면서 긴장되는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결과물이 어떻기를 바라나요? 당연히 재미있길 바라죠. 또 연기하면서 제가 표현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못한 건 편집됐으면 좋겠고.(웃음) 조마조마합니다.

<낙원의 밤>을 포함해 전작인 <차이나타운>과 <밀정>으로 인해 센 캐릭터로 각인되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실 그건 배우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센 캐릭터라도 각인되는 것 자체로 감사해요. 어쨌든 그 연기를 사람들이 인상 깊게 본 거니까요. 아무런 캐릭터가 없는 것보다 그런 수식이라도 갖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그런 말을 들으면 다른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생깁니다.

자신의 연기에 스스로 만족하는 편인가요? 전에는 전혀 안 그랬어요. 만족할 만한 순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나온 부분 있으면 잘‘ 했다. 다행이다. 여기 좋네.’ 이런 생각을 해요.

여유가 생긴 건가요? 여유가 생겼다거나 그사이에 갑자기 연기가 엄청늘어서 그런 건 아니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 같습니다. 또 연기만 바라보면 조금 덜 만족스러운 장면도 편집과 영상, 사운드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 더 나은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걸로도 좋다고 생각하게 됐고요.

영화 <밀정> 이후 연기가 재미있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도 같은 마음이 드나요? 네. 그 전에는 연기가 늘 힘들고 어려웠는데, <밀정>을 하면서 ‘이런 부분은 재미있다’는 걸 발견했고 그건 지금도 그래요. 그렇지만 아직도 어려움이 훨씬 많습니다.

그린 컬러 니트 풀오버와 팬츠 모두 코스(COS).

셔츠 스타일리유(Sty.Liu).
재킷과 팬츠 모두 네이비스튜디오(Navy Studio), 터틀넥과 블랙 베스트 모두 코스(Cos).
셔츠와 팬츠 모두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슈즈 자라(Zara).

연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 답이 없기 때문이죠. 사람이 기계가 아니라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 만큼 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준비를 많이 했는데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고요. 속상하죠. 어떻게 해도 안된다고 느낄 땐 절망적이고요. 역할이 커질수록 부담감도 커집니다. 그런 부분이 힘든 것 같아요. 그런데 맘처럼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명확한 정답이 있다면 더 좋을까요? 그러면 연기하는 재미가 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전 어릴 때부터 깜지 같은 걸 잘했어요. 누가 ‘너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해’ 하면 그것만 해내면 되니까 좋았죠. 그래서 연기도 비슷하게 접근합니다. 해야 할 캐릭터를 만나면 그것만 파고들어요. 그게 아니면 딱히 할 일도 없고요.(웃음)

그런 면에서 최근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 <바퀴 달린 집>은 무엇보다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정해진 캐릭터도, 해야 할 대사도 없는 리얼리티 형식이니까요. 예능 프로에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출연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영화 <판소리 복서>를 하면서 김희원 선배님과 친분이 생겼어요. 그걸 알고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왔고, 선배님께 연락했더니 “부담 갖지 마. 절대 나 때문에 나오진 말고. 그런데 난 네가 나오면 좋지” 하셔서“아, 네 선배님” 하고 답했어요. 그렇게 나가게 됐어요.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어요. 혹자는 너무 조용하고 낯을 가려서 오히려 주목하게 되는 ‘조용한 인싸’가 아니냐고 하던데요. 예능 프로가 처음인데 카메라도 너무 많고 선배님들도 계셔서 긴장을 많이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모습을 시청자들이 재미있게 봐줬다는 사실에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리고 촬영할 때는 워낙 긴장해서 잘 몰랐는데 나중에 방송을 보니까 성동일 선배님을 비롯해 다들 절 굉장히 많이 챙겨주셨더라고요. 뒤늦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예능 프로에서 볼 가능성도 있을까요? 초대해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나갈진 모르겠습니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그냥 자주 쓰는 것 같습니다. 배달한 음식이 왔을 때도, 좋은 얘기를 들을 때도, 매니저 분이 촬영장에 데리러 와줄 때도.

예능 프로뿐만 아니라 연기 외적인 시도를 해보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사실 연기할 때 워낙 힘들어서 그 외에는 딱히 뭘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리고 연기할 때마다 맡은 캐릭터가 하는 일을 해내야 하거든요. 그래서 연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해보곤 있습니다.

연기를 위해 도전한 일 중 지금까지 이어오는 게 있나요? 계속 하는 건 없습니다. 하하, 작품을 준비하고 촬영하는 동안 지겹도록 해서 그런지 끝나고 빠져 살진 않는 편이에요.

앞으로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나요? 그냥 한 작품 한 작품 지금처럼 충실히 잘해내고 싶습니다.

잘해낸다는 건 어떤 걸까요? 그 인물이 진짜 살아 있다고 느껴지는 연기를 하면 잘하는 거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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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하는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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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2020년, 우리가 주목한 얼굴들.

니트톱 에이치앤앰(H&M), 스커트 듀이듀이(Dewedewe).

미래의 어느 날,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생긴 좀비들에게 점령당한 한국은 세계에서 고립된다. 디스토피아의 한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여자아이, ‘준이’는 강인한 엄마와 어리지만 제 몫을 다하는 동생과 힘을 합쳐 좀비로 가득한 세상에서 빠져나온다. 영화 <반도>에서 배우 이레는 어른을 구하는 아이, 준이를 연기했다. “<반도>는 제게 선물 같은 영화예요. 머릿속이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을 때 찾아온 작품이거든요. 배우로서 제 미래에 큰 힘을 주었어요. 처음에는 준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더 잘해내고 싶은 마음에 진짜 열심히 연기했어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그러다 감독님이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하고 말씀하시는데, 그 한 마디가 큰 울림이 되었어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느낌이었죠. 그때부터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마음을 바꾸니 현장이 더 즐거워지더라고요.” 이레가 만들고 싶었던 준이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아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보며 만난 준이는 폐허의 땅에서 스스로 운전을 터득할 만큼 기백이 있고 남다른 아이였지만, 시나리오를 반복해서 읽을수록 다가온 준이는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아이였다. 준이에게 디스토피아에서 만난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수많은 일을 겪어낸 서사를 채워 넣었다. 설렘으로 작품을 만나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카 체이싱을 연기로 익히고 준이의 서사를 채우며 마친 <반도>가 상영까지 끝낸 오늘,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장의 풍경은 모든 배우들과 함께 식사하던 시간이다. “좀비를 연기한 배우들을 비롯해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늘 함께 식사했어요. 식구라는 단어가 함께 밥을 먹는 데서 나온 거잖아요. 정말 식구 같은 팀과 함께한 촬영장이었어요. 운전을 실제로 해본 적은 없지만 식구처럼 늘 함께한 그분들의 조언 덕에 카 체이싱 연기도 할 수 있었죠.” 가족은 <반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은 여자와 아이, 노인은 새로운 가족이 되고 그들이 연대한 덕분에 미래가 존재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우리가 함께 있었는데 왜 지옥이에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짧은 문장이지만 준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이 아이의 정서를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이레의 시작은 <소원>이었다. <소원>에서 상처투성이 시간 속에서 가족과 함께 위로와 희망을 찾던 여덟 살의 이레는 <반도>에서 가족을 구해냈다.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 아닌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무게감이 없다고 할 순 없어요. 앞으로 더 잘해낼 수 있을지,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죠. 이런 고민이 제 내공을 탄탄하게 다져주고 있어요. 무엇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하기 위해 배우가 된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을 저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현장의 스태프, 배우 선배님들과 함께 이야기와 캐릭터를 그려가는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게 어쩔 줄 모를만큼 재미있을 때도 있어요. 좋아하는 데 이유는 없어요. 이유 없이 설레고 이유 없이 좋아요. ‘그냥’. ‘그냥’이라는 단어에는 엄청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연기가 좋고, 그냥 시나리오를 받으면 설레요.” 앞으로 이레의 필모그래피가 어떤 작품으로 채워질지는 가늠할 수 없다. “연기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드라마나 영화를 하고 싶어요. 설령 작품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더라도 그렇지 않은 작품으로 만들어낼 능력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고요. 영화는 결국 관객에게 힘든 현실에서 잠시나마 도피하는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하잖아요. 행복하고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는 안식처를 만드는 배우이고 싶어요.” 이런 마음은 앞으로 가고 싶은 삶의 방향과 맞닿아 있다. “페이스를 잃지 않을 만큼 밑바탕을 단단하게 다지고 싶어요. 단단히 서 있을 수 있는 자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불안하지 않기 위해 지금 열심히 쌓아놔야죠. 선을 지키며 타인을 존중하고 그로 인해 존중받는 사람,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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