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덥석 사기 꺼려지는 패션 아이템을 만나면 남편에게 ‘컨펌’을 받는다. 여름이 다가오자 가장 먼저 쇼핑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온 건 마리 기우디첼리(Mari Giudicelli)의 블로퍼. 어떠냐고 묻기도 전에 남편은 그 신발 가격을 보자마자 ‘쓰레빠가 도대체 왜 이렇게 비싸냐’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가격을 재차 확인한다. 글쎄, 곱디고운 살구색 스웨이드에 보드라운 퍼가 트리밍되어 있고, 게다가 요즘 제일 핫한 브랜드 아닌가!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열 가지도 더 댈 수 있지만 남편에겐 그것이 ‘쓰레빠’인 게 문제였다. 하지만 슬리퍼는 무조건 허름해야 한다는 건 편견이고 모함이다.

2013년 봄, 세린느의 컬렉션에 등장한 ‘퍼켄스탁(모피가 깔린 버켄스탁 슬리퍼)’을 시작으로 패션계에는 쿠튀르급 슬리퍼가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고풍스러운 패턴의 자카드와 새틴, 퍼로 치장한 구찌의 ‘블로퍼’가 히트를 치며 그 입지를 공고히 한 것. 구찌를 비롯해 N°21, MSGM, 로샤스 등 여러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과감하고 화려한 슬리퍼가 큰 인기를 모으자 캐리오버 제품으로 등극시켜 매 시즌 디테일을 업그레이드해 출시하고 있다. 지난 호 <마리끌레르>에 소개된 사나이 313, 알룸네를 비롯해 마리 기우디 첼리, 브라더 벨리스 등 슬리퍼를 메인 아이템으로 삼은 브랜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을 정도. 이는 그만큼 슬리퍼에 매료된 사람이 많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슬리퍼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걸까? 허름해야 할 것 같은 아이템에 하이엔드급 디테일이 더해졌을 때 풍기는 반전의 묘미가 그 비결이다. 더불어 ‘쓰레빠’마저도 값비싼 퍼와 주얼리로 장식하고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럭셔리를 대변하기 때문이 아닐까? 버켄스탁과 구찌 홀스빗 로퍼, 아디다스 ‘삼선 슬리퍼’처럼 익숙한 것의 화려한 변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갑을 활짝 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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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랫동안 패션 마케터로 일해온 안은영이 미국에서 슬리퍼 브랜드 ‘아농(Annone)’을 론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농은 안은영이 직접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스티치를 수놓아 만든 빈티지한 컬러의 스웨이드 슬리퍼를 소개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수많은 아이템 중 슬리퍼를 선택했을까? “포틀랜드에서 가죽 크래프트 클래스를 들었는데, 워낙 슬리퍼를 좋아해 직접 만들어 신은 게 계기가 됐어요. 슬리퍼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편안함과 여유로움이죠.” 그녀의 설명처럼 발을 괴롭히지 않고도 패셔너블할 수 있다니 이토록 유혹적인 아이템이 또 있을까?

 

이 견고하고 아름다운 슬리퍼의 향연은 2016 F/W, 2017 리조트 컬렉션에서도 목도할 수 있다. 핑크 컬러 퍼에 볼드한 진주를 장식한 미우미우, 깃털로 포인트를 준 크리스토퍼 케인, 일본 전통 신발인 게다가 연상되는 구조적인 디자인을 선보인 아크네 스튜디오, 깔창에 컬러풀한 퍼를 매치한 마르케스 알메이다, 각각 주얼리와 커다란 구슬, 체인을 활용한 로샤스, N°21, 샤넬 등 여러 브랜드가 쿠튀르급 슬리퍼의 반전 매력을 어필하고 있다.

누군가 도대체 왜 ‘쓰레빠’를 그 값을 주고 사느냐고 묻는다면 매일 입는 베이식한 데님 팬츠부터 우아한 슬립 드레스에도 근사하게 어우러지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언제나 편안하게 신을 수 있는 건 이 ‘쓰레빠’뿐이라고 답하겠다. 마리 기우디첼리의 블로퍼는 결국 올여름 나와 함께하게 되었다. 아니, 속에 두꺼운 니트 양말을 신으면 가을, 겨울에도 문제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