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된 순간

알게 된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소설집 <화이트 호스> 속 여성들 그리고 작가 강화길의 이야기.

2020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하며 화제의 중심에 오른 작가 강화길이 세 번째 책이자 두 번째 단편소설집 <화이트 호스(White Horse)>를 출간했다. 수상작 ‘음복’으로 시작되는 7편의 작품 속에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 화자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부당한 인식이나 관습, 타인에 대한 평가, 사랑과 미움이 뒤얽힌 현실에 대해 ‘알고 있기에’ 더 은밀하게 전개되는 사건들. 이중 표제작 ‘화이트 호스’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부른 동명의 노래 가사로 마무리된다.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

소설집 <화이트 호스>가 얼마 전 출간됐다. 첫 책을 낸 당시에는 신기하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이번엔 확실히 그때와 달랐다. 2012년에 등단한 이후 10년 차와 신인의 과도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뭔가를 만들어낸 듯한 느낌이다.

앞서 낸 소설집 <괜찮은 사람>, 장편소설 <다른 사람> 과 이번 신작의 차이가 있다면? 전에는 인물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켜 전달하는 데 중점을 뒀다. 지금도 여전히 일인칭 화자가 등장하고, 그들의 감정에 관심이 많다. 다만 감정의 근원을 향해 파고 들어 가다 보면 여러 인물들이 얽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그 상황을 약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됐다.

2017년 발표한 ‘손’부터 올봄에 선보인 ‘가원’까지, 총 일곱 작품을 엮었다. 이 중 ‘화이트 호스’를 표제작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오물자의 출현’도 후보 중 하나였다. 전라도 방언으로 ‘인형’을 뜻하는 단어인 ‘오물자’가 주는 어감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교정지를 받은 후 작품들을 찬찬히 읽어봤는데, 7편의 소설에 숨겨진 의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동시에 책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기엔 ‘화이트 호스’가 가장 적절할 것 같았다. 실제로 표지를 보면 제목 아래에 문이 그려져 있다. 표지 디자인은 편집자의 아이디어인데, ‘화이트 호스’의 고딕 스릴러적 측면이 잘 드러나 마음에 든다.

‘화이트 호스’는 여성 소설가인 화자가 ‘하늘에서 내려온 영적 존재, 구원이나 선물’을 뜻하는 ‘화이트 호스’를 재정의하고, 글쓰기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이야기다. 그가 작가로서 하는 고민이 작품에 솔직하게 표현돼 있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 중 나와 가장 가까운 인 물을 고르자면 ‘화이트 호스’의 화자일 것이다. 평소에 는 거의 없는 일인데, ‘화이트 호스’는 이런 내용을 소설로 써야겠다는 느낌이 확 왔다. 그러다 보니 나를 메타적 화자로 내세우기가 보다 쉬웠던 것 같다.

7페이지에 걸친 ‘작가의 말’을 통해 ‘화이트 호스’를 쓰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했는데,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들을 남겼다. “다시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게는 소설로 충분하다.” 이전에 냈던 책들은 굳이 길게 첨언할 필요가 없었다. ‘화이트 호스’도 덧붙일 말은 없었지만, 지금이 과도기라면이 느낌을 어느 정도 서술하는 것이 작품과 어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써보고 싶기도 했고, 나름대로 내 소설에 대해 소개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다시는 길게 쓰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가는 거짓말쟁이니까.(웃음)

지난해 가을에 선보인 ‘음복’으로 2020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하며 또 한번 많은 주목을 받았다. 약 2년 전 발표한 <화이트 호스>에 담은 고민과 현재의 고민에 달라진 점이 있나? 당시의 마음이 지속되고 있다. 소설을 쓸 땐 지켜야 하는 규칙이 많고, 결과를 향해 다가가는 과정 자체가 복잡하며 신경도 꽤 쓰인다. 그런데도 왜 이걸 계속 쓰고 싶은지 스스로 질문하는 중이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쓸지에 대한 고민이 크다.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려는 욕심이 있다 보니 그런 듯하다.

‘음복’의 화자 ‘세나’는 남편 ‘정우’와 같이 정우의 할아버지 제사에 처음으로 참여한다. 제사를 소재로 삼은 계기는 무엇인가? 소설가에게 제사는 기본적으로 탐나는 소재다.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이를 기리기 위해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는데, 이 중에는 여성, 남성,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척 등 여러 인물이 존재한다. 자주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함께하니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고, 그 단면을 잘라 보여주면 소설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전부터 제사를 소재로 다뤄보고 싶었다. 다만 어떤 이야기로 응축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시가에서 세나는 정우네 가족 사이의 내밀한 갈등을 알아차린다.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가의 다른 여성 구성원들 역시 그 갈등에 대해 인지하고, 이를 공유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반면 정우는 아무것도 모른다. 전통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가족 안에는 갈등을 알고 있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감정에 책임을 지는 사람 등 다양한 인물이 있다. 물론 언제나 여성은 알고, 남성은 모르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음복’에서는 정우와 세나, 즉 아들과 며느리의 얼굴에 대표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봤다.

‘음복’처럼 대가족이 등장하는 작품을 구상할 때 무엇에 가장 중점을 두는 편인가? 인물 관계도에 제일 많이 신경 쓴다. 가족 이야기는 매우 개별적이면서도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지닌 특성을 공유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되는 것 처럼 느껴지는 독특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관계도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정우와 세나는 개성이 뚜렷하지만 가족 안으로 들어갔을 땐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든 걸 편하게 누리는 아들’과 ‘스스로 알아차리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며느리’가 된다. 이렇게 인물마다 다른 점, 다르면서도 가족 안에서 형성되는 같은 점을 동시에 담아야 많은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 같다.

한편, ‘카밀라’의 봉고차 납치 사건처럼 범죄를 포함한 여러 폭력적 상황이 소설집 곳곳에 등장한다. 가해자가 여성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많다. 여성이 가진 얼굴은 다양하고, 이 중에는 범죄자의 모습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딱히 의도가 있지는 않았지만, ‘인식 자체가 선입견일 수 있다’라는 측면을 소재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서우’로 예를 들면, 택시를 타고 귀가 중인 여성을 대상으로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화자는 대안으로 ‘여성 운전사’의 택시에 탑승한다. 그리고 안심하지만 이후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어 읽다 보면 오히려 화자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화이트 호스>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을 하나만 꼽는다면? 항상 제일 나중에 쓴 작품에 애착이 간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 중에서는 ‘가원’인데, 사랑이 넘치면서도 비정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화자 ‘연정’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랑받았고, 그들이 보여준 대로 사랑을 돌려준다. 할머니에게 혹독한 양육을 받은 연정으로서는 그에게 도저히 친절한 말이 건네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소설을 완성해가며 나를 돌아보게 되곤 하는데, ‘가원’을 쓸 땐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스스로에게 자주 물었다. 결론이 나진 않았지만, 마지막에 ‘왜 그 무책임한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이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것일까’라는 문장을 쓰며 내가 갖고 있던 어떤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다.

한 인터뷰에서 “내용의 결말보다는 감정의 결말을 중시한다”라는 말을 한 적 있고, 실제로도 대부분의 작품이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결말이 정해지는 것보다는 이야기가 흘러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작가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한 후 독자들과 공유하는데, 이때 일차원적으로 가지 않고 굴절되어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받아들이는건 독자의 몫이다.

<화이트 호스>는 본인에게 어떤 소설집으로 남게 될까? 앞으로 책을 더 출간하고 작가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작업을 마무리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지금까지 어떤 것들을 썼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화이트 호스>는 그 과정에 놓여 있는 소설집인 것 같다.

앞으로 출간 계획이 궁금하다. 세대별 가족사를 다루는 장편소설 3부작을 준비하고 있다. 1부는 지난해 ‘문학3’ 웹사이트에서 연재를 끝낸 ‘대불호텔의 유령’으로 내년 중 출간 계획이 있다. 이어 ‘음복’을 장편화한 2부, 소설 잡지 <악스트(Axt)>에 연재한 ‘치유의 빛’을 차례로 서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About the Author:

취하고 싶은 날에 어울리는 힙지로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