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아무리 근검절약을 다짐해도 1년에 두 번씩 돌아오는 패션위크 기간이면 쇼핑 욕구를 잠재우기 어렵다. 그런데 근래 이 위기의 순간이 두 번이나 더 늘었다. 최근 몇 년 새 젠더리스가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 잡으며 범접 불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남성 컬렉션을 보고 나도 입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패션에서 남녀의 경계가 없다는 건 단순히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 전통적 성 역할에 대한 도전과 투쟁의 의미를 갖는다. 양성평등을 주장하던 페미니즘에서 한발 더 나아가 누구나 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최근 대두한 젠더리스의 개념이다. 물론 과거에도 런웨이에서 수트를 입은 여성 모델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근래엔 남성복처럼 보이는 옷이 아니라 실제 남자 옷을 입는 한층 직접적인 방법으로 변화했다. 매니시 룩이 좀 더 폭넓은 함의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트렌드에 따라 런웨이 위 남자 모델이 입은 룩도 ‘여성이 소화할 수 있는 옷’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지난 6월 말 발표된 남성 컬렉션은 마치 남성보다 여성 고객에 초점을 맞춘 듯 고운 컬러와 디테일로 가득했다.

디자이너가 바뀌며 화제를 모은 루이 비통의 남성복 쇼장은 알록달록 무지개 색이, 디올의 쇼장은 분홍빛과 장미가 사방에 가득해 한눈에도 밝은 분위기로 연출됐다. 이 두 브랜드 외에 이번 시즌 처음으로 남성복을 선보인 자크뮈스를 비롯해 MSGM, 아크네 스튜디오, 넘버21 등에서도 분홍, 옐로, 파스텔컬러 같은 여성성을 대표하던 컬러를 많이 사용했다. 컬러뿐 아니다. 대다수 컬렉션에 등장한 기다란 니트는 벨트를 매 원피스로 입기에 손색없어 보였고, 아우터도 수선하지 않고 당장 입을 수 있을 만큼 성별 구분이 없는 디자인이었다. 헤드스카프를 활용하거나 주얼리로 장식하는 등 여성복에서만 보이던 스타일링에서 남녀를 구분 짓지 않은 디자이너들의 생각이 드러났다. 게다가 런웨이 위의 몇몇 모델은 긴 머리와 중성적인 외모로 젠더리스 트렌드에 힘을 더했다. 최근 맨즈 웨어와 여성 레디투웨어가 나란히 놓고 보면 한 컬렉션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닮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남성복을 즐겨 입는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남성복의 장점을 말하자면 트렌드를 떠나서 우선 무척 편하다. 학창 시절 교복을 시작으로 10년 넘게 몸의 곡선에 꼭 맞는 여성복만 입다가 여유로운 핏의 남성복을 입었을 때 느끼는 편안함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 게다가 스타일링하기에 따라 남성복의 직선적인 실루엣은 여성을 좀 더 지적이면서 섹시해 보이게 만든다. 이쯤 되면 남성복에 관심이 조금 생기지 않는가. 이제 여성복뿐 아니라 남성복 매장에서도 흡족하게 쇼핑할 수 있을 듯하다. 지금 우리는 젠더에서 자유로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