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을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아이돌의 공연을 직접 보러 가거나 집에서 조용히 노래를 듣거나. 하지만 이것 말고 ‘뭔가 다른 것’을 원했던 여자들은 ‘슬픔의 케이팝 파티(이하 슬케파)’라는 또 하나의 선택지를 더했다. K-POP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중심이 되어 음악을 즐기는 것이다. 트위터의 한 계정이었던 ‘슬케파’는 지난가을 운영 2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 파티를 열었다. 공연 현장 곳곳에 붙은 포스터 속 ‘갔어 오지 않아’, ‘나 어떡해요 언니’라는 익숙한 듯 낯설게 느껴지는 이 문장은 지금까지 계정에서 아카이빙 해왔던 K-POP 노랫말이다. 칼럼니스트 복길은 그저 재미를 위해 친구들과 함께 트위터에 좋아하는 K-POP 영상과 가사를 기록했다. 점점 이와 비슷한 이름과 형식의 계정이 여럿 생겼고, K-POP을 듣는 건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고. “사람들이 왜 K-POP을 숨어서 들을까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생각해보니 K-POP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티켓을 구매해 콘서트에 가거나 남들 모르게 집에서 몰래 듣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그럼 우리가 파티를 열자는 얘기가 나왔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즐겨보자는 거였어요.”(복길) 이 ‘슬픔의 케이팝 파티’(@seulpeumkpop)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왁자지껄한 파티에 ‘슬픔’이라는 단어가 붙는다는 게 조금 의아하지만, 이들은 K-POP이라는 장르 한편에 슬픔이 깔려 있다고 말한다. “K-POP은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고, 그래서 평생을 들어온 음악이에요. 소위 말하는 ‘빠순이’, 혹은 ‘빠순이’의 친구로 살아온 여자들도 많고요. 예를 들어 너무 어린 친구들에게 성적 대상화가 가해지는 것 같은 K-POP 산업의 문제점은 분명 존재하는데, 그 부작용을 고스란히 겪는 것도 여성 팬들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K-POP은 슬픈 산업, 슬픈 음악이죠.”(복길)

복길은 지난 2년 동안 아카이빙 작업을 하면서 조용히 파티를 준비했다. 시작부터 실제로 오프라인 파티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계획이 미뤄졌다. 그러던 중 여성 DJ를 중심으로 한 그룹 왝플러리가 여기에 힘을 보태면서 준비에 가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시작된 슬케파의 1부는 라디오 부스로 관객에게 전날 신청곡과 사연을 받아 진행한 토크쇼다. 의상, 안무 같은 비주얼적인 요소가 강조된 음악인 K-POP을 보는 대신 듣고 이야기를 나누자는 시도다. 복길과 힙합 뮤지션 ‘슬릭’ 그리고 SNS에 서브 컬처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을 게스트로 초대해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논의는 다양했다. 좋아하는 곡에 대한 짧고 강렬한 코멘트부터 자신의 ‘덕질’ 역사를 써 내려간 관객의 사연,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걸그룹들과 여전히 활동하는 보이그룹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K-POP에 있어 우리 각자가 가진 이야기가 있고 그래서 할 수 있는 대화가 정말 많다는 걸 알게 됐죠. K-POP을 보지도, 소비하지도 않은 채 앉아서 하는 감상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라디오 부스는 그걸 깨는 일종의 퍼포먼스이기도 했어요.”(사람)

2부는 왝플러리의 파티로 채워졌다. 준비 단계에서 파티를 진행할 DJ들을 찾는 게 가장 어려웠다. “여성 DJ, 그것도 K-POP을 틀 수 있는 분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어요. DJ나 디제잉에 관심 있는 사람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를 대비하는 의미도 있었고요.”(GCM) 왝플러리의 기획자이자 DJ인 GCM은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사이에 중간 광고를 걸었다. 디제잉을 배우고 싶은 사람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낸 광고인데 생각보다 많은 분이 지원해주셨어요. 제가 감당할 수있는 인원을 넘어서서 중간에 끊어낼 정도였죠. 관심은 있지만 접근이 어려워 디제잉을 주저하는 분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GCM)

광고가 끝나고 GCM을 포함한 네 명의 여성DJ가 만들어온 믹스셋을 틀었다. 각자 상의 없이 리스트를 짰는데도 겹치는 곡은 단 2곡뿐이었다. “처음엔 신청곡을 받았어요. 이게 세상의 모든 K-POP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곡을 신청해주셔서 신청곡의 의미가 없을 정도였죠. 그래서 DJ들에게 본인만의 믹스셋을 짜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것도 EDM, 2000년대에 나온 케이팝, 힙합 등 정말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만날 수 있었어요.”(복길)

파티는 뜨거웠다. 이날 파티가 열렸던 명월관에 다녀간 사람만 3백 명이넘었다고. 관객의 커다란 호응 속에 파티는 마무리됐지만, 미처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과 외국인들의 요청 끝에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 또 한 번의 파티를 열기로 했다. 이전 공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는 파티였기에 두 번째 공연이 아닌 앙코르 공연이라 이름 붙였다. 연말이니만큼 이번 컨셉트는 ‘시상식’이다. “조촐하게 끝날 거라 생각했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는 파티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예요. 많은 관심을 주신 만큼 지난번 파티에서 아쉬웠던 점을 보완해 더 재밌게 놀 수 있게 보답해야죠.”(복길)

놀 곳이 없으면 직접 만들고, 안 되면 해버리는 진취적인 여자들의 파티, 슬케파. 이제 겨우 한 번의 공연을 끝냈지만 그 존재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복길은 더 많은 여자들이 ‘슬픔의 케이팝 파티’와 비슷한 일을 벌이기 바란다. “이 계정을 만들면서 비슷한 이름과 형식을 따온 계정이 많이 생긴 것처럼 슬케파 역시 그랬으면 좋겠어요. 베껴도 괜찮고요. 여자들이 뛰쳐나가서 일을 벌이는 거, 좋잖아요!”(복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