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가 없다면 종말이 올 것이라고,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아포칼립스적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은 인생의 ‘노잼’ 시기를 일컫는다. 물론 노잼 시기라는 것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워딩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건 마치 ‘너 지금부터 술도 담배도 음악도 다 압수야’ 하는 상황에 버금갈 정도로, 섹스는 내가 매료된 메가 어딕션 중 하나였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만을 남겨둔다고 가정할 때, 섹스는 단연 리스트의 상위에 랭크돼 있었음을 밝힌다. 섹스를 밝히는 여자? 맞다. 섹스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관계라고 하는 어휘의 드넓은 함의 중에서도, 사람과 사람이 맨살을 대고 있는 것보다 진정한 교섭 관계이자 내연한 상태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없다. 그때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20대는 보통의 또래 남녀들처럼 많은 시간을 섹스와 연애에 몰두했다. 섹스가 곧 연애인 케이스는 드물었다. 섹스를 하고 나서야 연애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연애가 끝나도 여전히 섹스를 하는 관계도 있었다. 나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의 역사는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와 나는 8개월을 만나고 헤어졌다. 그리고 4년간 섹스 파트너로 지내왔다. 제안은 내 쪽에서 먼저 했다. 왜 그랬느냐고? 아마도 미련 때문이었으리라. 만난 기간은 8개월이 전부였지만, 그 짧은 기간은 이전에 만난 모든 엑스들과 쌓은 옛정을 희석해버릴 만큼,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가장 강렬한 오르가슴을 선사했기에. 밉고 싫고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마음과 그가 아니면 또 어디서 이런 섹스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미련이 상충했고, 결국 승자는 오르가슴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 관계에서 빠져나왔는가. 2년이란 시간을 두고 그때를 다시금 회상해보니 점점 선명해진다. 내가 얼마나 그 관계에 무수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는지를. 섹스라고 했지만, 그것은 비단 섹스만이 아니었다. 매일 같이 가던 내 집 같은 그의 집, 내 칫솔과 그의 칫솔이 나란히 걸려 있는 칫솔걸이를 보면서 피어오르던 여러 감정들. 친구는 말했다. “너희는 같이 앞으로 걷기는 싫고, 그렇다고 헤어지기는 싫어서 그냥 옆으로 계속 걷는 거야. 게도 아니고 뭐하는 거냐, 그게.” 그랬다. 우리는 한 쌍의 게처럼 나란히 누워 있기만 했다. 잠든 그의 넓은 등짝에 내 얼굴을 푹 박고서 이것은 섹스일까, 사랑일까 고민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 넓은 등짝과 섹스를 끝마치고 서로의 품속으로 빨아들일 듯 안아주는 짧디짧은 시간, 각자의 땀이 서로의 몸에 닿는 순간, 그런 것들은 사랑일 수가 없다. 그것은 그저 감각이 감각하는 감정이었다. 내가 아닌, 타인과의 밀착. 그 감촉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간 그렇게 누워 있다가 둘 중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각자 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우리는 마주 보지 않고, 나란히 앞을 보았다. 멀리 번쩍이는 마포대교를 보고,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높디높은 건물 유리창에 반사되는 달빛을 보고, 점점이 지나가는 행인들에 눈길을 주었다. 각자 다른 상을 응시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다시는 보지 않기로 하고 서로에게서 멀어진 지금, 나는 이제 더 이상 그와의 추억을 꺼내 보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다. 우리가 연애를 한 것이라면, 연인의 모습을 띠고 있던 우리가 함께한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인 채 가끔씩 나를 멜랑콜리하게 만들었을 텐데. 관계에 어떤 이름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감정의 정의 또한 바뀌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다만 나는 그 감촉을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감촉의 온도를.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금세 식어버리고 마는 몸의 열기와 냉기를.

그와 헤어진 후, 나는 섹스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누군가의 등을 맞대고 누워 잠을 자거나 손가락과 손가락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반경 안으로 타인을 허용한다거나 하는 행위에 가담해본 적이 없다. 섹스가 없으면 그건 종말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지낸 시기에 나는 섹스를 하지 않으면 마치 여성으로서 매력이 제로인 사람처럼 주눅 들었고, 언제고 상대에게 섹슈얼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그런 끝없는 강박과 자괴감에서 무척 멀리 벗어나 있다.

일단은 몸에 관한 강박이다. 와이어가 옭아매던 푸시업 브라를 굳이 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아름답다는 걸 느낀다. 부러 의식화한 것이 아니다. 그전과 다른 곡선이 내 몸의 아우트라인이 되었고, 그 자유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섹스를 예감하며 불편한 언더웨어를 감수하는 바보 같은 짓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겨드랑이와 무릎에 난 털들을 굳이 제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아마 다시 섹스를 하게 된다해도, 나는 내 몸을 사랑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나만의 곡선을 즐길 것이다. 섹스를 하지 않은 근 1년간, 나는 무엇보다도 내 일에 집중했다. 심적 해소의 도구로 섹스를 택하지도 않는다. 글쓰기라는 노동은 업무와 휴식 간의 물리적 거리감이 없는 작업이다. 일상의 전부를 쏟아부어 힘써야 하는 때가 잦은데, 나는 그런 스트레스가 찾아올 때마다 섹스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피하지 않는다. 고스란히 겪어내야 하는 부담을 정면으로 응수하는 것. 30대 직업 여성으로서 내가 바라던 상태다. 나는 이 집중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런 시기는 자연스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기꺼이 멈춤과 머묾을 해내려는 가장 온화한 방식의 전투다. 내 커리어를 위한 전투.

내게는 그 무엇보다 감촉이 보드라운 털을 지닌 고양이 두 마리가 있고, 친동생이 선물로 준 값비싼 베개가 있다. 나는 더 이상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게 섹스는 사랑도 중독도 아닌, 단지 어떤 감촉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다. 오랫동안 감촉의 농간에 꽤 당한 셈이니, 이제는 다른 감각을 찾기로 한다. 이를테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까 겁내며 들여다보았던 내 몸을, 이제는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응시하는 감각 같은 것 말이다. 누군가 나의 속살을 보지 않아도, 나는 나를 위해 향이 좋은 오일을 바르기로 한다. 생활에서 섹스를 제거하고 나니, 진정 보이는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그 어떤 폭발력 있는 오르가슴보다 더 해방감을 준다는 점에서 탈섹스는 종말이 아니라 일종의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