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럭셔리 이후 패션은 다시 장식과 우아함, 그리고 비실용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쿠튀르는 더 이상 비현실적 판타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2026 프리폴(PRE-FALL) 시즌 컬렉션에서 등장한 ‘스트리트 쿠튀르’는 지하철과 거리, 피트니스 센터 같은 가장 현실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며 평범한 하루를 조금 더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환상이 되고 있다.

“우리는 진실을 견디기 위해 예술을 가진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에게 예술이란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삶을 끝까지 견디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사실 한동안 패션은 조용하고 절제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로고와 장식을 덜어낸 이른바 콰이어트 럭셔리는 실용과 단정함, 그리고 쉽게 질리지 않는 클래식을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과잉 소비와 노골적인 로고 플레이에 대한 피로 속에서 패션은 오래 입을 수 있는 옷과 쉽게 낡지 않는 취향을 이야기했다. 절제된 우아함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세련된 선택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욕망이 절제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지나치게 매끈하고 조용한 옷들이 마치 공식처럼 반복되자, 패션은 다시 감각적 즐거움과 장식의 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건 이번 시즌의 화려함이 과거처럼 비현실적 판타지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패션이 다시 장식과 우아함, 그리고 비실용적인 아름다움을 향하는 흐름 역시 어쩌면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인간은 결국 기능과 효율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번 프리폴 시즌, 많은 브랜드가 쿠튀르를 현실의 공간 위로 끌어내렸다. 그 흐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건 샤넬의 프리폴 시즌 2026 공방 컬렉션이다. 수백 시간에 걸쳐 완성한 자수와 깃털 세공, 아틀리에의 장인정신이 집약된 공방 컬렉션은 오트 쿠튀르에 가장 가까운 정교함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현실의 삶을 향해 열려 있는 컬렉션이다. 이런 옷이 향한 곳은 뜻밖에도 세계를 호령한 역사적 공간도 유서 깊은 살롱도 아닌 뉴욕의 지하철이었다. 플랫폼 위로 기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왔고, 무심한 얼굴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델들이 트위드와 깃털, 섬세한 자수와 반짝이는 장식들로 회색빛 지하철을 가득 채운 것. 마티유 블라지는 자신의 첫 번째 공방 컬렉션을 통해 지하철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공간에 쿠튀르적 환상을 올려두었다. 그는 “뉴욕 지하철은 모두의 것입니다. 학생부터 혁신가, 정치인, 10대 청소년까지 누구나 이용하죠. 신비롭고 멋진 만남이 가득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각자의 갈 길로 향하는 곳입니다. 영화 속 이야기처럼, 그들은 각자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죠”라고 말했다.


한편 발렌시아가는 지하철을 넘어 거리와 피트니스 센터, 실내 공간을 배경으로 한 캠페인을 통해 또 다른 형태의 현실 속 쿠튀르를 제안했다. 제2의 피부처럼 착 감기는 실용적인 테크 웨어 위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특유의 구조적이고 조각적인 실루엣을 더하며, 기능성과 쿠튀르의 경계를 흐리게 한 것이다.

디올 역시 하우스의 쿠튀르적 헤리티지를 현대적 방식으로 재해석하며 오늘의 삶을 위한 쿠튀르를 제안했다. 조나단 앤더슨은 과거의 아카이브에서 영감 받아 실루엣을 새롭게 뒤틀고 장르를 교차하는 방식을 택했다. 초경량 데님 위에 쿠튀르적 볼륨감을 더해 부풀린 와이드 팬츠는 그의 접근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1949년 하우스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 ‘델프트’의 날개형 옆트임에서 영감을 받아 2026 S/S 맨즈 웨어 컬렉션의 카고 팬츠로 재해석한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리본을 촘촘히 엮어 수공예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바 재킷, 정교한 자수를 수놓은 턱시도 셋업, 안쪽에 덧댄 튈이 자유롭게 흘러나오도록 연출한 드레스까지. 일상에 뛰어든 쿠튀르를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실루엣을 고안했다.

블루마린의 프리폴 컬렉션은 베네치아에서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내 안의 예술가를 깨워준다.” 데이비드 코마의 말처럼 가면무도회, 우아한 퇴폐미, 화려하고 관능적인 룩으로 베네치아의 초저녁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커다란 꽃 모티프 아플리케 장식부터 살결이 비치는 레이스 보디수트, 드레스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퍼 코트와 코르셋까지. 현실을 잠시 잊게 만드는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실루엣은 꿈결 같은 환상을 일상에 덧입혔다.

셰미나 카말리가 이끄는 끌로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끌로에 헤리티지 특유의 낭만과 자유로움을 현대적으로 구현하며 ‘일상을 위한 판타지’를 그려온 그는 이번 프리폴 컬렉션에서 하우스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끌로에 팀의 20대 영 크리에이터들의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었다. 실용적인 실루엣 위에 과장되게 부풀린 허리 장식을 더하거나, 러플이 달린 블라우스와 흐르는 듯 발끝까지 내려오는 시폰 드레스에 거친 레더 블루종을 매치하는 식이다. 현실적인 워드로브 위에 비실용적일 만큼 낭만적인 디테일을 덧입히며, 일상 속으로 스며든 보헤미안 쿠튀르의 새로운 형태를 제안했다.
이처럼 최근 패션 신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화려함이 더 이상 비현실적인 판타지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의 삶을 기반으로 거리와 쿠튀르, 레디투웨어와 환상의 경계 역시 점점 흐려지고 있다. 이번 프리폴 컬렉션에 등장한 쿠튀르 또한 특별한 순간만을 위한 과장된 우아함이라기보다, 평범한 하루를 조금 더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냈다. 앞서 언급한 니체의 말처럼 예술은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삶을 끝까지 견디게 하는 힘에 가깝다. 그리고 지금 패션이 다시 장식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유 역시 결국 현실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에게는 여전히, 삶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어줄 작은 환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