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여 년 만에 펜디로 돌아온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개인보다 연결을 지향하는 '나보다 우리'라는 새로운 선언을 컬렉션에 담아냈습니다.
- 그는 남녀 복식의 경계를 넘어선 자기표현과 아틀리에의 장인정신, 그리고 옷의 시간을 이어가는 정서적 지속성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 스스로 완성되지 않았다고 믿으며 시대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가 그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 완성됐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계속 옷을 만드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오늘을 어떻게 해석해 내일을 상상할 것인지. 질문을 그치지 않는 태도는 30여 년 만에 펜디로 돌아온 그의 첫 컬렉션에도 그대로 담겼다. ‘나보다 우리(Less I, More Us)’. 개인보다 연결을, 과거보다 미래를 향한 새로운 선언이었다.

약 30년 만에 펜디로 돌아왔다. 첫 컬렉션을 준비하며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펜디의 헤리티지를 이어간다는 것, 동시대의 패션을 완성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한 시즌의 컬렉션으로 풀어낸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결국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성과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드는 일에 대한 고민이다.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처음 펜디에서 일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패션계는 크게 달라졌고, 나 역시 개인적으로나 디자이너로서나 많이 성장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펜디의 다음 시대를 함께 만들어가고 싶었다.




지난 2월에 밀라노에서 당신의 첫 펜디 컬렉션을 직접 보았다. ‘나보다 우리(Less I, More Us)’를 키워드로 전면에 내세웠는데, 한 시즌을 대표하는 메시지라기보다 앞으로 하우스 를 이끌어갈 방향으로 느껴졌다. 내 의지를 담은 일종의 선언이다. 내가 어떤 태도로 일하고 싶은지, 무엇을 지향하는 사람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함께 일하는 것의 가치, 그리고 타인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개성을 지우자는 뜻이 아니다. 각자가 가진 강점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을 때 저마다 가진 역량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믿는다.
당신은 오랜 시간 여성의 시선에서 옷을 만들어왔고, 그 꾸준한 행보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다. 지금의 펜디에서 ‘여성을 위한 옷’이란 어떤 의미인가? 여성성은 언제나 페미니즘과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패션이 자신을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여성들이 깨닫길 바란다. 오늘날 여성의 옷장을 여성복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남성복과 여성복을 함께 디자인한다. 그렇다고 둘의 차이를 지우고 싶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복과 남성복의 구분이 아니라 각각을 어떻게 조합해 자신을 표현하는가. 패션은 각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이니 말이다.


1백 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온 펜디에서 당신이 가장 지키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가? 펜디 헤리티지의 중심에는 아틀리에가 있다. 놀라운 기술력으로 완성도를 극대화하는 장인들은 칼 라거펠트의 창의성은 물론,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와 킴 존스의 비전에도 형태를 부여해왔다. 펜디에 돌아온 후 처음 아틀리에를 찾았을 때부터 깊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함께 작업을 시작한 뒤에는 그 감탄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언제나 기대를 뛰어넘는 완성도로 나를 놀라게 한다. 그 장인정신을 이어가고 더 발전시키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헤리티지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을 거쳐 미래로 이어진다.





펜디는 오랜 시간 퍼를 다뤄온 하우스다. 최근 ‘에코 오브 러브(Echo of Love)’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에 사용하던 퍼를 다시 해석하는 시도를 선보였는데, 하우스의 유산을 동시대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더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 있나? 한 벌의 옷이 더 오래 살아갈 수 있는 법. 단순히 수명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쌓일수록 더 큰 가치를 갖게 하는 일이다. 이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표현이 바로 ‘정서적 지속성(EmotionalDurability)’이다. 과거의 흔적을 품은 옷은 우리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 감정은 옷에 대체 불가한 가치를 부여한다. 오래된 옷은 시간을 품은 배터리와 같다. 그 안에 저장된 시간을 다시 현재로 가져오면 옷은 또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다.
현시대를 읽는 감각은 어디에서 얻나? 내게는 두 자녀가 있다. 첫째 니콜로와 둘째 라켈레. 그들은 나를 새로운 세대와 마주하게 한다. 그 덕분에 새로운 음악과 책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늘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 현재 라켈레는 펜디의 이미지 디렉션을 맡아 함께 일하고 있다. 예리한 시선과 끝없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내가 펼쳐가는 비전을 더 선명한 이미지로 구현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준다.
그렇다면 당신을 이루는 헤리티지란 무엇인가? 내 삶의 방식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로마를 떠나 파리에 살 때도, 로마로 돌아온 현재도 마찬가지다. 로마는 내 일부이자 나를 만든 도시다. 로마에서 보낸 시간은 지금도 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 나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옷을 만드는 일이 여전히 당신을 설레게 하는지 궁금하다. 물론이다. 그 설렘이 나를 움직인다. 하지만 오늘날 패션은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시스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만큼의 책임도 따른다. 패션이 경제와 문화, 사람들의 인식까지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 만큼, 디자이너 역시 그 무게를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을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무언가?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특히 패션이 끊임없이 시대와 함께 변해야 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이 좋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계속 질문한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호기심과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스스로 완성됐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오늘을 해석하고 내일을 상상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그것이 내가 계속 옷을 디자인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