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성은 물론 확고한 정체성, 동시대성과 미술사적 의의까지.
올해 키아프 서울의 하이라이트 섹션이 주목하는 작가 10인의 면면.

LEE CHAE YOUNG
Sun Gallery
이채영(1984, 한국)은 덕성여자대학교 동양화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 동양화를 전공했다. 한지와 먹으로 도시 외곽의 소외된 풍경을 담아내며 서로 다른 시간을 한 화면에 쌓는다. 소마미술관, 포스코미술관, 자하미술관, 미메시스 뮤지엄 등 여러 기관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작업에 영감을 주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장소’는 어떤 곳인가?
처음 발걸음을 멈추게 한 장소는 어느 폐공장 부지였다. 건물과 무성한 잡풀만 남은 넓은 공간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을 느꼈고, 그 풍경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후 작업을 이어오면서 내가 무엇에 이끌리는지를 더 고민했다. 오래 바라볼수록 하나의 풍경 안에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가 겹쳐 있다고 느낀다. 이미 사라진 것과 아직 남아 있는 것, 이전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포개져 있고, 그사이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장소들을 일부러 찾아 나서기보다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많다.
실제 풍경과 내면의 풍경이 그림 안에서 서로 어떤 영향을 발휘하나?
작업의 기반이 되는 실제 풍경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그런 풍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바라보고 작업하는 동안 풍경이 나의 내면으로 들어오면서 여과되고 변화한다. 그 과정에서 구체적인 장소나 형태는 점차 흐려지는 반면, 그곳에서 감각한 시간과 흔적, 부재는 오히려 선명해진다. 그렇게 내면에 남은 감각과 기억이 다시 실제 풍경에 개입하며 화면을 변화시킨다. 실제의 장소와 형태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기억과 감각을 더하고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가 뒤섞이면서 또 다른 풍경으로 변해간다. 결국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고, 그 경계 역시 모호해진다.

한지와 먹으로 그려낸 흑백의 풍경이 지닌 특유의 정서가 인상적이다.
과거에는 채색을 비롯해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며 여러 시도를 했다. 하지만 작업의 흐름이 선명해지면서, 여러 재료와 색을 사용할수록 풍경에서 느낀 생경함과 깊은 분위기가 오히려 흐려지는 것 같았다. 깊은 적막과 시간의 층위가 겹쳐 있는 풍경을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먹의 농담과 흑백이 가진 정서에 주목했다. 특히 먹은 깊이 있는 색감을 만들어내고, 한지에 스며들며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먹은 한 번 스며들면 완전히 되돌리기 어렵고, 옅은 먹을 여러 번 쌓을수록 이전의 흔적 위에 새로운 층이 더해진다. 이러한 과정은 내가 바라보는 시간의 방식과도 닮아있다. 풍경을 오래 바라보면서 시간이 그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지나간 시간의 흔적 위에 또 다른 시간이 더해지고,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들이 겹쳐지며 밀도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다시 색을 조금씩 사용하고 있다. 다만 색 자체가 먼저 드러나는 화면보다는 먹과 마찬가지로 여러 번 쌓이고 스며들면서 쉽게 특정할 수 없는 색과 분위기를 구현해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올해 키아프에서는 어떤 작품을 소개하나?
도시 외곽의 빈터나 기능을 잃은 장소를 그린 작품들이다. 이러한 풍경은 명확한 장소를 명명하기보다 시간이 머물다 간 자리에서 시작된다. 사람이 떠난 이후의 공간과 기능을 잃은 구조물, 멈춰 선 풍경은 어떤 사건을 말하기보다 남겨진 상태에 가깝다. 사라지는 것과 남아 있는 것들 사이에서 어떤 것은 서서히 옅어지고, 어떤 것은 그 자리에 남아 다른 밀도로 지속된다. 나는 이러한 상태를 따라가며, 그사이에 머무는 감각을 찾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