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통해 ‘좋은 어른’의 태도를 고민하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우정의 방식을 떠올리기.
김도영 감독이 <인턴>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들.

9개월 만의 컴백이다. 지난해 연말 개봉한 <만약에 우리>로 섬세한 감성을 입증한 김도영 감독은 이번에도 남과 여,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달라진 게 있다면 멜로가 아니라 세대를 뛰어넘은 우정의 서사라는 점이다. 로버트 드니로와 앤 해서웨이 주연의 2015년 개봉작 <인턴>이 그렇게 10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우리에게 당도했다. 김도영 감독은 잇따른 리메이크 영화 연출의 부담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도 어쩌면 지금 시대에 더 필요한 이야기라는 데 수긍했다고 말한다. 최민식과 한소희. 생소한 듯하지만 볼수록 자연스러운 짝패처럼 보이는 이 신선한 배우 조합은 감독의 자랑스럽고 든든한 ‘비장의 무기’다.


첫 장편 연출작인 <82년생 김지영>으로부터 7년이 흘러 어느덧 세 번째 연출작이다. 배우로 살았던 기간보다는 짧지만, 연출가로서 보낸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가?
결과론적으로는 연기하며 무대에서 치열하게 쌓은 경험을 잘 활용하며 살고 있지 않나 싶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마치 내가 지나온 모든 과정이 지금을 위한 일이었던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처음에는 연출전공으로 입학했다가 연기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배우가 됐다. 같은 대사라도 왜 누가 하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고, 또 다른 누가 하면 마음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지 궁금해서 연구하기 시작한 거다. 열심히 했지만 잘하고 싶다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 컸다. 그런데 연출을 할 때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편안하게 찾은 기분이 든다.
편안하다고 느끼는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일생이 필요한 사람도 있는데 행운이 따른 셈이다. 배우를 보는 마음 역시 달라졌나?
물론이다. 고수들은 연기를 즐기겠지만 나는 그 경지까지 못 갔다. 끝없는 자기 검열을 내려놓고 즐기는 게 어려웠던 거다. 먹고살기 위해 연기를 가르치는 일을 할 때는 부모의 마음으로 배우를 바라봤다.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이 강점인지 파악해야 하니까. 연출가로서 배우를 대할 때는 그의 연기를 훨씬 즐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협업이니까. 판을 넓게 깔아주고, 나의 판단을 온전히 신뢰하는 배우가 여러 공을 꺼내 다채롭게 저글링 하는 모습을 즐기며 바라보다가 어떤 공을 고를지 선택하면 된다.
문가영 배우가 <만약에 우리>로 제6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할 때 감흥이 특별했겠다. 연기 경력에 비해 그간 스크린과 접점이 적었던 배우다.
역시 내 배우!(웃음) 함께 작업하는 동안 내심 그가 상을 받았으면 했다. 드라마에서는 채 드러나지 않았던 모습을 끄집어내고 싶었고, 배우가 아주 잘해냈다. 수상하는 순간에는 자랑스러운 걸 넘어 성취감마저 느꼈다. 함께 작업한 배우가 상을 받으면 어깨가 펴진다. 구교환 배우의 연기에 대한 칭찬도 많아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캐스팅의 의외성을 고민하는 연출자라는 인상이 있다. 실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인가?
배우에게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중요하게 본다. <인턴>의 한소희 배우 캐스팅이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지만, 정작 나는 실제로 그를 만나보고 ‘선우’ 역할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원작을 리메이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타깃층은 누구였나? 그러니까 누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나?
사회 초년생을 포함해 자기 삶을 열심히 꾸려가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떠올렸다. ‘기호’(최민식) 세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었는데, 얼마 전 서울시에서 실제 시니어 인턴으로 일하는 분들과 함께한 시사회 자리에서 그들의 반응을 본 뒤 비로소 확신했다. 아직 노동력이 있지만 노동시장에서 퇴출당한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 이 영화가 따뜻하게 다가가고 있음을 느꼈다.
<만약에 우리>와 <인턴>을 연달아 거치며 리메이크 연출 자체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있나?
리메이크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전히 필요한 이야기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업이다. 다만 유명 원작의 힘이 아주 세다는 사실만큼은 절실히 느꼈다. <인턴>만 해도 내가 합류하기 전 원작과 거의 같은 버전부터 더 파격적으로 바뀐 것까지 다양한 버전이 있었다. 그런데 원작과 너무 많이 달라지면 ‘이게 <인턴>인가?’ 하는 의문이 들더라. 솔직히 이번 영화는 연출자로서 야망은 조금 내려놓고 <인턴>이 관객에게 따뜻한 이야기로 온전히 다가갈 수 있도록, 배우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작업이었다.
각본 수정 과정에서 ‘이건 <인턴>이 아니다’라고 느낀 적이 있다면, 역으로 무엇을 핵심에 남길지를 더욱 촘촘하게 고민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맞다. 각 기 다른 존재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나아가 우정을 쌓는 이야기가 결국 핵심이라고 봤다. 각 세대가 다른 세대를 끊임없이 규정하며 편견을 쌓는 시대 아닌가. 실생활에서 자주 만나 한데 섞일 일도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다만 영화에서 이를 너무 진지하게 풀기보다 유머러스하고 따스한 분위기로 완성하자는 생각이었다.
<만약에 우리> 후반 작업 도중 <인턴> 연출을 수락했다. 무엇을 믿은 건가?
단연 최민식 배우다. <만약에 우리>를 작업하면서 리메이크가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는 사실을 실감했고, 다음에는 웬만해서는 피하고 싶었다. <인턴>의 리메이크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누가 연출할지는 모르지만 엄청 고생하겠다며 염려했을 정도다.(웃음) 감독을 제안받았을 때 선배님이 이미 캐스팅되신 뒤였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어떻게 그와 한 작품에서 만날 수 있을까 싶더라. “젊을 때는 삶이 여행자의 가방 같았다”는 기호의 초반 내레이션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관객에게 기호를 처음 선보일 때 어떤 사람으로 소개하고 싶었나?
기호의 내레이션은 선배님과 나눈 대화 내용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다. 요즘 무엇을 느끼시냐고 자주 물었다. 지금껏 꽤 많은 것을 이룬 듯한 데 자꾸만 허전하다고 하시더라. 뭔지 모를 숙제 하나 안 한 것 같은 기분이라고. <인턴>은 기호가 자신의 공허함을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선배님의 소회가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은퇴 후의 사람을 상상했더니 결승선을 통과한 달리기 선수가 떠오르더라. 아직 달릴 힘이 남아 있는데 경기를 마치고 터덜터덜 트랙을 걷고 있는 이미지가. 기호는 그런 사람일 것 같았다.
최민식과 한소희, 두 주연배우를 나란히 두고는 정반대의 고민을 했을 것 같다. 한 명은 지금껏 스크린에서 아주 많은 것을 보여준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보여주지 않은 것이 더 많은 사람이다.
최민식 선배님을 어떻게 보여줄까 하는 고민은 특별히 없었다. 이미 기호와 너무 닮아 있었다. 배우 최민식이 켜켜이 쌓아온 필모그래피와 사람 자체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캐릭터와 공명하면서 인물이 한층 풍부해졌다고 본다. 한소희 배우는 그에게서 어떤 얼굴을 꺼낼 수 있을까 정도만 즐겁게 고민한 경우다. 내가 연기할 때 만났다면 많이 부러워했을 독보적 이미지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내게 “한소희 씨는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자기 팔레트에 저렇게 많은 색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그 감상을 듣고 무척 기뻤다.
연출가의 연령대가 기호와 선우의 딱 중간 세대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양쪽을 두루 볼 수 있는 입장 아닌가.
최민식 선배는 내가 자꾸 당신과 비슷한 세대라고 하시고, 나는 아니라고 우긴다.(웃음)
중간자 입장에서 보는 윗세대와 아랫세대는 각각 어떤 오해를 짊어지고 있다고 보나?
대사에도 나오지만 젊은 사람들은 윗세대가 그저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 마치 그에게는 처음부터 청년 시절이 없던 것처럼 ‘우리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거다. 한편 청년 세대도 엄청 난 편견에 시달리지 않나. 버릇이 없다, 끝도 없이 말을 줄인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웃음) 세대마다 사정이 있는데 말이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소통은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어른이란 뭘까 자주 생각했다. 결국은 선을 잘 지키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손을 내밀면 잡아주고, 믿어달라면 믿어주는 태도 말이다. 나와 내 아이들의 관계도 돌아보게 됐다. 왜 엄마로서 내비치는 염려를 전부 잔소리로 듣는 걸까,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그렇게 잘 들으면서! 중요한 건 말의 내용보다 태도다. 타인은 부모가 하듯 아이에게 자신의 욕망을 함부로 투사하지는 않으니까. 나보다 어린 세대를 대할 때 그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개봉 후에 가장 많이 회자될 신은 역시 이자카야 장면 아닐까? 회사와 결혼 생활의 방향성 앞에서 흔들리는 선우에게 기호는 “정신 차려!”라며 일갈한다. 원작의 영어 대사로는 뉘앙스를 살릴 수 없는 ‘반말’의 힘을 강력하게 느꼈다.
기호가 호통을 친 뒤에 “대표님이 제 딸이라면 이렇게 얘기할 것 같네요”라고 하지 않나. 원래 각본에는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현장에서 최민식 선배님이 도치법 아이디어를 내신 거다. 연기는 결국 에너지인데, 순간적으로 실로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촬영장에서 있던 모두가 느꼈다. 기호가 선우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하면서도 선을 잘 지키는 사 람이라는 점이 명징하게 보이는 장면이다.
역시 우리 모두에겐 멘토가 필요한 걸까?
좋은 멘토는 비단 젊은 사람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시기마다 필요한 것 같다. 인생이 얼마나 풍부해지겠나. 다만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마음을 열고 본다면 좋 은 영화나 책도 인생의 훌륭한 멘토 역할을 한다.
김도영 감독에게는 멘토가 있나?
한국예술종합학교 박종원 교수님이 내겐 그런 존재다. 연출의 길로 들어섰을 때 정말 큰 도움을 주신 분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연출을 고심할 무렵 “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해?” 라고 물으셨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회라는 건 없을지 모르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무조건 할 만한 이야기로 만들면 된다고 하셨다. 말씀해주신 것들을 늘 염두하려 한다.
또 어떤 조언을 들었나?
강말금 배우와 찍은 단편영화 <자유연기> 때 사연이 각별하다. 인물이 독백하는 하이라이트 장면을 촬영할 때의 일이었다. 리허설이 정말 좋았는데 막상 본 촬영 때 배우의 연기가 그만큼 안 나오더라. 리허설은 나와 배우 둘이서만 했지만, 현장에서는 촬영장 주변의 소음을 통제하느라 모두가 시간에 쫓기면서 배우가 점점 초조해진 거다. 나도 마음이 너무 급해서 이제 울어야 하지 않겠냐며 배우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건 최악의 연출이다. 그 순간부터 배우는 울기 위한 연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테이크는 아주 좋았는데 녹음 상태에 문제가 있었다. 편집에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박 교수님께 재촬영을 해야 할지 여쭈었더니 “3명 중에 2명이 좋다고 얘기하면 재촬영할 필요가 없다. 대신 감독으로서 이 결함을 어떻게 메워낼 수 있을지 고민하면 이번 계기가 네게 큰 수업이 될 거다” 라고 하셨다. 결국 재촬영 없이 편집에서 매만졌다.
연기 디렉팅에나 편집에나 좋은 깨달음을 얻었을 것 같다.
그때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재작년까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의도 했다. 나만 알고 있는 게 직무 유기처럼 느껴져서. 기껏 좋은 글을 써놓고도 배우들과 소통하는 법을 몰라서 헤매는 연출가들에게 내가 경험으로 깨달은 몇 가지가 도움이 됐으면 했다.
<인턴> 현장에서도 자신의 원칙을 무사히 지켰나?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 가령 배우에게 특정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 ‘이건 슬픈 장면이야’처럼 형용사로 말하지 않고 필요할 때는 구체적인 액션을 지시하려 했다. ‘액션’과 ‘컷’을 외치는 사이, 그 시간만큼은 카메라 앞에 선 배우를 온전히 믿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