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 하우스들이 최근 캠페인 제작을 넘어 감독 후원과 장편 영화 직접 제작에 뛰어들며 영역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 구찌와 발렌시아가는 런웨이 대신 단편영화 시사회를 열거나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출을 활용했습니다.
- 생 로랑은 프로덕션 설립 후 짐 자무시 감독 지원 등을 통해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닮은 캠페인부터 감독에게 의뢰한 단편영화, 패션 하우스가 직접 제작한 장편영화까지. 패션과 영화의 관계가 어느 때보다 가까워지고 있다. 패션은 왜 이토록 영화에 매료되는 걸까.

영화는 없는데 예고편은 있다. 메종 마르지엘라가 2026 가을·겨울 캠페인을 위해 선보인 것은 영원히 개봉하지 않을 스릴러영화의 예고편이다. 배우 레베카 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ANONYMITY>에는 제목도, 인물도, 불길한 분위기도 있지만 정작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남겨진 것은 몇 개의 장면과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을 상상하는 즐거움뿐이다. 어쩌면 이 기묘한 예고편은 오늘날 패션과 영화의 관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패션이 영화의 형식을 빌리는 일은 새롭지 않지만, 최근 두 매체의 관계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패션 하우스는 캠페인을 한 편의 영화처럼 만들고, 저명한 감독에게 독립적인 단편영화를 의뢰하며, 급기야 직접 영화제작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옷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과 영화 자체를 만들기 위해 투자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패션은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한 걸까.
존재하지 않는 영화의 예고편
티보 그레베가 연출한 메종 마르지엘라의 <ANONYMITY>는 패션과 영화가 공유하는 오래된 관심사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정체성이다. 우리는 옷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영상에서 레베카 홀은 가면을 쓴 자신의 분신과 마주한다. 그 가면은 실제로 2026 F/W 컬렉션을 위해 메종의 아틀리에에서 제작한 것으로, 익명성과 정체성을 탐구해온 마르지엘라의 세계를 상징한다. 옷과 가면은 인물을 꾸미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누구인지 묻게 하는 장치가 된다. 영화는 존재하지 않기에 결말도 없다. 그러나 몇 개의 장면만으로도 우리는 그 인물의 과거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게 된다. 마르지엘라가 영화에서 빌려온 것은 단순히 스릴러의 분위기가 아니라,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방식이다.

영화가 가진 힘은 여기에 있다. 옷을 입은 사람에게 성격과 감정, 그가 살아가는 시간을 부여하는 것. 뎀나 역시 새로운 구찌의 출발을 알리는 방법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2025년 9월, 첫 컬렉션 ‘La Famiglia’를 공개하며 전통적인 런웨이 대신 단편영화 <TheTiger>의 시사회를 연 것이다. 스파이크 존즈와 할리나 레인이 공동 연출한 이 블랙코미디에는 데미 무어, 에드워드 노턴, 엘리엇 페이지 등이 출연한다. 영화는 가상의 구찌 가문을 이끄는 바버라 구찌의 생일 파티에서 시작된다. 완벽한 가문의 모습을 유지하려던 그의 계획이 예상치 못한 소동으로 무너지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보다 먼저 인물들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뎀나는 컬렉션의 각 룩에 서로 다른 이름과 성격을 부여했고, 감독들은 이를 바탕으로 인물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옷이 인물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돌이켜보면 이는 뎀나에게 낯선 시도가 아니다. 발렌시아가 시절부터 그는 런웨이의 관습을 뒤집고 패션쇼를 하나의 공연이자 사건으로 만들어왔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과 협업한 패션 필름부터 눈보라 속에서 펼쳐진 런웨이까지, 그에게 컬렉션을 선보이는 방식은 옷만큼이나 중요한 표현의 일부였다. 그렇다면 구찌에서 영화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오랜 역사와 뚜렷한 정체성을 지닌 구찌에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그에게는 어떤 옷을 만들 것인지 못지않게, 그 옷을 누가 입고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보여주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영화는 새로운 구찌의 인물들을 한꺼번에 소개할 수 있는 무대였던 셈이다.

영화의 시선이 일상적인 순간을 특별하게 바꾸기도 한다. 발렌시아가가 셀린 송 감독과 함께 만든 <A New York Minute>에서는 배우 사라 피전이 뉴욕의 거리를 걷고, 세탁소에 들르고, 택시를 탄다. 각각 60초로 이루어진 세 편의 짧은 영상은 특별할 것 없는 도시의 일상을 따라가다가,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 촬영 현장을 드러낸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던 장면이 사실은 영화 속 영화였던 것이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셀린 송의 시선은 평범한 풍경과 그 안에 놓인 인물, 옷까지 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패션은 감독에게 무엇을 맡기는가

미우미우의 우먼스 테일(Women’s Tales)은 이 질문에 흥미로운 답을 내놓는다. 2011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여성 감독들에게 단편영화 제작을 의뢰하며, 여성성과 여성의 경험을 저마다의 시선으로 탐구해왔다. 아녜스 바르다, 에이바 듀버네이, 미란다 줄라이 등 서로 다른 영화적 세계를 구축해온 감독들이 참여했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들이 하나의 통일된 광고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감독들은 각자의 관심사와 영화적 표현 방식을 작품에 담아낸다. 패션 하우스가 원하는 이미지를 감독에게 재현하도록 주문하는 대신, 감독의 독창적인 세계가 펼쳐질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의 자유는 실제 참여 감독들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2016년 <That One Day>를 연출한 크리스털 모젤은 미우미우가 브랜드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다른 자신의 구상을 받아들였으며, 최종 편집권까지 맡겼다고 밝혔다. 여성 스케이트보더들의 우정과 연대를 담은 이 영화에서 미우미우의 옷은 감독이 창조해낸 세계의 일부로 존재한다. 2024년 <El Affaire Miu Miu>를 연출한 로라 시타렐라 역시 브랜드로부터 이야기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고 회상한다.

2026년 공개된 서른두 번째 작품은 클레르 드니의 <Avec Kim>이다. 영화는 파리의 자동차 정비소에서 시작된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의 여자가 자동차를 수리하고, 도시를 돌아다니다 킴 고든을 만나러 향한다. 수잔 랭동이 연기한 이 여자는 특별한 사건을 겪기보다 도시의 풍경 속에서 움직이고, 사람들을 만나고, 시간을 보낸다. 대사보다 몸짓과 소리, 인물의 존재감이 앞서는 영화다. 출연 배우 킴 고든은 정해진 대본 없이 파리에서 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정도의 설명만 들었다고 회상했다. 미리 완성된 이미지를 재현하기보다 촬영 현장에서 발견되는 움직임과 감정이 작품을 만들어간 셈이다. 영화에서 옷 역시 흥미로운 역할을 한다. 작업복 차림의 수잔 랭동과 두꺼운 시어링 코트에 크리스털 장식 모자를 쓴 킴 고든은 서로 다른 분위기를 지녔지만, 두 사람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교환하는 순간 그 경계가 느슨해진다. 수잔 랭동은 이 장면이 서로 다른 세대의 두 여성이 나누는 우정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옷은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장치가 된다. 클레르 드니의 영화에서 패션은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그 일부로 존재한다.
미우미우의 시도가 흥미로운 이유는 브랜드가 자신의 이미지를 설명하는 대신 타인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물론 이 역시 브랜드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캠페인의 수명을 넘어 독립적인 작품으로 남을 수 있다. 패션이 영화에서 얻는 것이 감독의 명성과 독창적인 시선이라면, 영화는 패션으로부터 새로운 창작의 기회를 얻는다. 바야흐로 패션과 영화가 서로의 가능성을 넓혀주는 관계가 된 것이다.
패션 하우스가 영화 제작자가 될 때

생 로랑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최근 생 로랑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서 물러난 안토니 바카렐로가 2023년 설립한 생 로랑 프로덕션은 영화 제작을 패션 하우스의 정식 사업 영역으로 삼은 사례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Strange Way of Life>,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The Shrouds>, 자크 오디아르의 <Emilia Pérez> 등 여러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며 영화계에서 존재감을 쌓아왔다. 2025년에는 짐 자무시 감독의 <Father Mother Sister Brother>가 제8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톰 웨이츠, 케이트 블란쳇, 애덤 드라이버, 샬럿 램플링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미국, 아일랜드, 프랑스를 배경으로 성인이 된 자녀와 부모 사이의 거리, 가족 안에 남겨진 감정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패션 컬렉션을 홍보하기 위한 영상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영화로 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패션 디자이너인 안토니 바카렐로는 왜 영화제작에 직접 뛰어들었을까. 그 답을 찾으려면 그의 오랜 영화 사랑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벨기에에서 영화가 일상을 벗어나는 통로였다고 회상한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작품을 보며 성장한 그는 컬렉션을 구상할 때도 한 여성이 어디로 가고, 누구를 사랑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부터 상상한다고 말한다. 영화 속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의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쳐온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애정이 곧바로 영화제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카렐로는 영화제작에 뛰어든 이유를 설명하며 “영화는 생 로랑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작업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감독들이 제작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태도는 함께 작업한 감독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짐 자무시는 생 로랑과의 협업을 두고 “마치 르네상스 시대로 돌아가 후원자를 얻은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그는 생 로랑이 영화에 브랜드의 의상을 등장시키거나 홍보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바카렐로가 창작의 자유를 보장했다고 밝혔다. 패션 하우스가 자신의 이미지를 영화에 투영하기보다 감독이 원하는 작품을 완성하도록 지원한 것이다. 물론 바카렐로는 영화가 브랜드에 가져다주는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광고판에 등장한 브랜드의 이름은 한 달이면 잊힐 수 있지만, 영화에 남겨진 생 로랑 이라는 이름은 20년 뒤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생 로랑이 영화에서 발견한 가치는 바로 이 두 가지일 것이다. 감독이 원하는 작품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는 동시에, 브랜드의 이름도 그 작품과 함께 오래 남기는 것. 영화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알리는 수단을 넘어 그 이름을 영화의 역사 안에 새겨 넣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생 로랑 프로덕션이 참여한 작품 가운데 메종 마르지엘라의 <ANONYMITY>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있다. 장 뤽 고다르의 유작 <Trailer of a Movie That Will Never Exist: Phony Wars>다. 고다르가 생전에 구상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영화를 위한 이 실험적인 단편은 영화의 아이디어와 이미지, 참고 자료를 엮어 만들어졌다. 마르지엘라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스릴러 영화의 예고편을 캠페인으로 기획했다면, 고다르는 실현되지 못한 영화의 구상을 하나의 작품으로 남긴 것이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완성된 영화가 아닌, 영화가 될 수도 있었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패션이 영화의 형식을 빌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패션 하우스가 영화감독의 마지막 상상을 세상에 내놓는데 참여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패션 하우스가 영화를 지원하는 것은 예술을 위한 일일까, 브랜드를 위한 일일까. 아마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는 브랜드에 문화적 권위와 오래 지속되는 이미지를 부여하고, 브랜드의 자본은 감독에게 작품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영화제작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패션 하우스의 참여는 감독들에게 또 다른 가능성이 될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관계에서 영화가 얼마나 독립적인 창작물로 존재할 수 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브랜드가 영화의 가치를 단지 홍보 효과로 환산하지 않을 때, 비로소 두 영역의 만남은 보다 흥미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어쩌면 패션과 영화가 서로에게 끌리는 이유는 두 매체 모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패션은 옷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제안하고, 영화는 그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을 보여준다. 하나는 몸에서 출발하고 다른 하나는 스크린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두 매체는 인물과 그가 속한 세계를 구축해간다. 마르지엘라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의 예고편을 만들었고, 생 로랑은 실제로 존재하는 영화를 제작했다. 하나는 영화의 형식을 빌려 패션의 세계를 완성하고, 다른 하나는 영화 자체 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한다. 그 사이에서 패션과 영화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패션은 영화가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었던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