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티>가 끝났지만 ‘고혜란’이라는 캐릭터가 강렬했던 만큼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당분간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미스티>와 관련된 스케줄이 남아 있기도 하고 캐릭터도 여운이 많이 남는다. 지금의 일상도 김남주와 고혜란이 섞여 있다. 엄마로 김남주의 삶을 살다가 밖에 나오면 고혜란으로 돌아온다. 나 자신이 고혜란처럼 변한 부분도 있다. 어떤 불편한 상황에 처하면 그녀처럼 정면 돌파하며 멋있게 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지레 겁먹지 않고 용기 있게.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미스티>를 어떤 작품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은가? 이 작품 이전의 나는 배우란 직업을 가진 사람일 뿐이었다. 선뜻 배우 김남주라고 나를 소개할 수 없었다. ‘배우’라는 단어가 나를 수식하기에 거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엄마로 사는 삶이 충분히 행복했고, 엄마이면서 내가 연기할 수 있는 현장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미스티>를 만나고 나서야 내 인생에서 연기가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게 됐다. 그 전에는 내가 과연 배우로서 자질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존감이 높지 않았고 내가 특별히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배우로서 좀 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필모그래피를 채운 많은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도 자신에게 너그럽지 않은 것 같다. 한 번도 작품이 성공한 이유를 나에게서 찾은 적이 없다. 좋은 작가를 만났고, 훌륭한 대본이 있고 그에 맞게 충실히 연기했기에 좋은 결과가 있었던 거지 내가 가진 어떤 특별한 힘 덕분이 아니었다. <내조의 여왕> 때는 좀 달랐는데, 작가가 내게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점을 발견하고 그 부분을 대본으로 잘 표현해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 때문에 작품이 더 살았다거나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미스티> 역시 대본이 좋았다. 또 감독이 잘 받쳐주었고 캐스팅도 만족스러웠다. 남은 건 내가 열심히 하는 것뿐. 고혜란처럼 지독하리만큼 악착같이 연기했다. 다시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열정을 다 쏟아부었다.
<미스티>가 6년 만의 작품이었다. 작품과 작품 사이 공백이 너무 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나?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이다.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쳤는데, 아이가 해내는 걸 지켜보면 신기하고 행복하다. 연기는 내 직업이니까 의무감에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나는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 즐겁고 연기하는 순간이 그저 행복한 사람은 아니다. 작품을 선택할 때 엄마의 역할을 잠시 접어둬도 될 만큼 도전하고 싶고 승부수를 띄울 만한 작품을 고르고 고르게 된다. 엄마로 살아가는 데 충분히 만족하기에 공백 때문에 조급한 마음은 전혀 없다. 내겐 빠른 호흡으로 작품을 하는 것보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 완벽하게 나를 설득하지 못하는 대본에 나를 잘 맡기지 않는다. 모든 걸 걸어볼 만한 작품이라고 설득되면 그제야 나를 맡긴다. <미스티>는 잘될 줄 알았다.(웃음) 대본도 캐릭터도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 동안 없던 여성 캐릭터이니 시청자들도 매력을 느낄 거라고 확신했다. 능동적이고 자신의 원칙을 지키며 그에 반하는 것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
여성 배우는 남성 배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의 폭이 좁다. 그렇기에 고혜란이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안타까운 부분이다. 여성 배우가 엄마가 아닌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을 연기할 기회가 많지 않으니 말이다. 여성 캐릭터도 극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거창한 포부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미스티>가 여성 캐릭터도 충분히 작품의 중심이 되어 극을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 같다.
작품을 고르는 속도가 앞으로도 지금과 변함없을 것 같은가? <미스티>가 끝나고 관련 기사를 읽는데 이런 댓글이 있었다. ‘그럼 이제 6년 후에 누나를 봐야 하나?’(웃음) 평소에는 댓글을 잘 읽지 않았다. 악플을 보면 괜스레 상처 받고, 마음이 아프니까. 그런데 <미스티>를 하는 동안 고혜란을 응원하는 글이 많았다. 그런 댓글이 힘이 되고 용기를 주더라. 이번 작품을 하기까지 6년이란 시간이 걸린 줄 몰랐다. 6년 만에 컴백한다는 기사를 보고 잘못된 정보인 줄 알았다.(웃음) 당연히 계획한 것도 아니고. 6년의 공백 끝에 작품을 했으니 최소 2년을 쉬어야겠다거나, 다음 작품은 몇 년 후에 해야겠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언제든지 좋은 작품을 만나면 당연히 해야겠지. 다만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다. 내 나이 자체는 자랑스럽다.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신이 주신 신체 나이는 어쩔 수 없으니, 좀 더 일찍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번 작품을 기점으로 연기가 더 절실해졌을 수도 있겠다. 여전히 거창하게 얘기할 수는 없다. 다만 이제야 내가 배우 자질이 있고 연기에 재능이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
앞으로 좀 더 부지런히 작품을 찾아볼 생각은 없나? 그 부분은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작품을 기다리지만 찾아다니기보다는 기다릴 생각이다. 큰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고 있어 엄마와의 교감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여전히 엄마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신중하게 준비하고 앞으로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좋은 작품을 계속 기다려야겠지. 배우로 성취하고 싶은 목표도 달라진 건 없다. 더 잘되어봤자 김남주 아닌가. 다만 요즘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겪으며 배우로 인정받는 느낌은 든다. 지금까지 해온 작품과 완전히 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연기했고 박수도 많이 받았다. 내 안에 아직 보여줄 것이 많은 것 같다.
김남주는 10년 후에도 여전히 배우로 살아가고 있을까? 말로는 연기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하지만 여전히 배우로 살고 있을 것 같다. 조급해하지도, 욕심부리지도 않고 안정적으로. 지금처럼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 없어 할 것이고, 연기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배우로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좀 더 용기 있게 살려고 마음먹긴 했지만 새로운 작품 앞에서 겁나긴 하겠지. 그래도 열심히 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게 인생의 좌우명이기도 하고. 매 순간 열심히 사느라 어느 한 순간 쉬운 적이 없었다. 뭔가를 쉽게 하는 법이 없다. 뭘 하나 하면 괴로우리만큼 애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밥을 할 때도 영양소를 꼼꼼히 따졌다. 아이를 안을 때도 책에 나온 대로 안으려 했다. 피곤한 스타일이다.(웃음) 혹여 배우로서 잊혀진다 한들 어떤가. 괜찮다. 또 다른 길이 있겠지.
지금 김남주 안에 여러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다.(웃음) 좀 더 용기있게 연기하겠다는 다짐을 말하면서 다시 배우로서 잊혀진다 한들 어떤가 하며 한 발 물러나 있다. 맞다. 지금의 나는 김남주와 고혜란이 섞여 있다. 엄마의 삶으로 반은 돌아갔고 나머지 반은 여전히 배우 김남주 혹은 고혜란으로 살고 있다. 고혜란을 아직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다른 캐릭터를 만나 빠지기 전까지 당분간 고혜란을 잃고 싶지 않다. 이번 작품을 위해 걸음걸이도 바꿨다. 이왕 어렵게 완성한 캐릭터니 그녀처럼 멋지게 걷고, 말하고, 살고 싶다. 아, 물론 고혜란처럼 마음 아프게 살진 말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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