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두 번째죠? 어떤 시간을 보냈어요? 공연 두 편을 봤어요. 뮤지컬 <라이언킹>과 연극 <슬립노모어>를 봤는데, <슬립노모어>는 뉴욕에서 요즘 굉장히 핫한 작품이래요. 관객 참여형 공연이라 해야 할까. 무대와 객석의 구분 없이 호텔로 꾸민 공연장 전체를 관객이 움직이며 관람하는 특이한 극인데 좋게 봤어요. 뉴욕에 머무는 동안 동행한 팀과 함께 패키지 여행을 하듯 몰려다녀서 그런지 일주일이 짧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도 반나절은 혼자 첼시에 가서 전시를 보기도 했고요.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은 오랜만이었겠어요. 그래서 유독 짧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그렇지만은 않은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끝내고 한 달 동안 두문불출하며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거든요. 서울에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꽤 보냈어요.
긴 여정을 위해 챙겨온 책이나 영화가 있나요? 드라마 <라이프> 몇 편을 챙겨 가서 비행기에서 봤어요. 책을 여섯 권 가져갔고요. (웃음) 제가 독서 습관이 좀 독특해요. 한 권에 집중해서 오래 읽기보다는 잡히는 대로 그때 그때 읽는 편이라 여러 권 챙겨갔어요. 결국 몇 쪽 못 읽었지만요. 가져간 책들이 한 번에 오래 볼 수 없는 어려운 내용이기도 했거든요. 나중에 다시 들고 돌아 오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익숙한 공간에서 떠나오면 새로운 생각이나 감상이 들기도 하죠. 드라마 종영하고, 서울에서 벗어나니 <미스터 션샤인>으로 보낸 시간에 대해 새롭게 드는 생각이 있나요? 대부분의 일이 그렇겠지만 촬영하는 동안에는 불안감과 초조감, 스트레스로 많이 지쳐 있었는데 막상 끝나니 그 순간 이후에는 그런 상태가 빠르게 희석되는 것 같아요. 지금 잘 회복하는 중이에요. 이제는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드라마와 관련한 인사를 가장 많이 받아요.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누면 그분이 작품을 어떻게 봤는지 알잖아요. 많은 분이 이 드 라마를 참 잘 봐주셨구나,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었구나 하고 새삼 느껴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 기간 중 김태리를 가장 기쁘게 한 순간은 언제였나요? 온전히 나의 즐거운 순간이라고 기억되는 때요. 드라마는 아무래도 진행상 무작정 대기해야 하는 때가 있거든요. 영화도 그렇지만 드라마가 훨씬 더 그런 것 같아요. 2시간이고 4시간이고 기다리는 게 일인데, 그 날도 새벽까지 대기하는 날이었어요. 함안댁을 연기한 이정은 선배님이랑 함께 있었거든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촬영지 근처를 둘이 나란히 무작정 걸었어요. 둘 다 한복 입고, 뒷짐 지고 걸으면서 수다를 계속 떨었는데 돌아보면 그 순간이 참 행복했어요. 마음 맞는 사람과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는 새벽 시간··· 좋았어요. 피곤한 것도 못 느낄 정도로요.
이 드라마에서 오래 기억하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꼽자면요? 유진(이병헌)과 처음 만났을 때요. 한성 거리에 처음 전기가 들어온 날이었죠. 가로등이 켜지고, 전차도 지나다니는 통에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어수선했어요.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길이지만 다들 불 켜진 가로등을 보느라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죠. 그 누구도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 상황에서 유진과 애신만이 서로에게 시선을 주는 그 장면. 멋졌어요. 오직 두 사람만이 서로를 인지하고 있는 순간이요.
작년과 올해는 생애 가장 바쁜 시기였을 것 같아요. 정신없이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언가요? 단 하루를 쉬더라도 그 쉼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거요.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제때에 흘려보내지 않으면 결국 누적되고 촬영에도 방해가 되니까요. 바쁘게 움직이고 일하는 것으로 에너지를 얻는 이들도 있지만 적어도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적당한 비율로 일과 휴식의 시간을 배분하고, 짧은 시간에도 온전히 잘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다운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시대죠. ‘김태리답게 잘 살아야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저란 사람은··· 물건을 잘 떨어뜨려요. 화장실 불 끄는 것도 자주 잊고, 했던 말도 종종 까먹고요. 그래서 김태리답게 잘 살자! 그래서는 안 될 것 같고.(웃음) 그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동경하는 건 좋지만, 그리고 배울 점이 있다면 배우는 건 좋은 태도지만 그 또한 과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별로인데 저 사람은 최고구나’ 하고 나를 잃어버리는 건 경계해야죠. 하루에 휴대폰 두 번 떨어뜨리고, 액정 깨뜨리는 저지만 그럼에도 나에 대한 판단과 관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나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요.
영화 <아가씨>를 끝내고 <마리끌레르>와 한 인터뷰에서 ‘<아가씨> 이후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게 된다 해도 괜찮을 자신이 있냐’는 질문에 ‘지금보다 연기를 못할 수도 있고, 덜 재미있는 작품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한 계속 배우로 살 것이다’라고 답했었죠? 그 후 매번, 작품마다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어왔어요. 다시 묻고 싶어요. 여전히 대중의 기대를 배반하게 된다 해도 괜찮은가요? 배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바란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요. 그렇다고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매달려서도 안 될 걸 알고요. 부담스러우니까요. 하지만 부담이 없을 수는 없어요. 적절히 긴장하면서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연기를 계속하고 싶어요.
차기작을 정하지 않았죠? 올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생각인가요? 갑자기 작품이 생기면 달라지겠지만 일단 동면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겨울잠이요. 제가 중3 때 겨울잠을 자고 키가 10cm 컸거든요.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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