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김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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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EL

버지니 비아르의 첫 번째 레디투웨어 컬렉션이 공개됐다. 그녀가 진두지휘한 레디투웨어는 과연 어떨지, 쇼 시작 전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그랑 팔레는 파리의 상징인 고즈넉한 루프톱으로 변신해 있었다. “파리의 지붕에는 누벨바그의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 <세버그>에서 진 세버그의 인생을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당시 가브리엘 샤넬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연기한 배우들을 떠올렸습니다.” 곳곳에 굴뚝이 있는 아연 지붕과 보도 위를 거니는 샤넬 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단숨에 버지니 비아르가 꿈꾸는 파리의 낭만이 전해졌다. 1960년대 풍 트위드 미니 점프수트, 사랑스러운 A라인 태피터 스커트, 발목까지 내려오는 데님 사브리나 팬츠 등 진 세버그가 2020년을 살고 있다면 입었을 법한 룩의 향연이었다. 컬렉션은 전반적으로 소녀 감성에 젖어 있었고, 대체로 실용적인 옷이 이어졌다. 버지니 비아르의 확고한 취향과 샤넬의 새로운 비전을 느낄 수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샤넬만이 보여줄 수 있는 파격적이고 강렬한, 쇼다운 쇼가 그리웠다.

CHRISTOPHER KANE

크리스토퍼 케인의 새 시즌 테마는 ‘에코 섹슈얼(Eco-Sexual)’이다. 케인은 이질적인 두 단어의 조합을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것, 자연 속에서 사랑을 만드는 것, 지구와 접촉하고 별들과 함께 자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증명하듯 케인과 여동생이 런던 필즈의 야생재건지역에서 촬영한 들꽃 사진이 쇼장 벽에 빔 형태로 나타났고, 뒤이어 플로럴 프린트와 달, 밤하늘, 지구 등이 그려진 쇼피스가 줄지어 등장했다. 그는 또한 관능적으로 컷아웃한 드레스와 슬립 드레스를 통해 관객이 앞서 설명한 테마를 중의적으로, 정확히는 섹시한 방식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 쇼를 어떻게 읽어낼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지만, 그가 매 시즌 섹스를 주제로 삼아온 만큼 두 번째 해석에 무게가 쏠리는 건 당연했다.

YCH

와이씨에이치는 애니 오클리(Annie Oakley)에게 영감을 받았다. 명사수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였던 그녀의 모습은 숲을 연상시키는 프린트와 직선적인 실루엣의 수트, 강렬한 인상을 주는 가죽 소재를 통해 런웨이 위에 재현됐다. 간혹 가슴골이 보일 만큼 깊이 풀어 헤친 셔츠나 시스루 팬츠처럼 이질적인 옷이 등장해 의미 있는 주제와 맞지 않는 인상을 주었으나, 옷 자체의 미감만 따진다면 멋스러웠다. 이번 쇼에서 가장 눈에 띈 점은 액세서리를 절묘하게 매치하는 윤춘호의 능력이다. 끈을 달고 목에 감아 연출한 버킷 햇이나 건축적 디자인의 신발, 장총 케이스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형태의 가방은 룩의 완성도를 몇 배로 높이며 보는 재미를 더했다. 서울패션위크 기간에 그의 쇼를 볼 수 없는 건 아쉬웠지만, 한국 패션의 높은 수준을 알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충분한 쇼였다.

PUSH BUTTON

푸시버튼은 힘을 빼는 데 성공했다. 직전 시즌까지 고수해온 과장된 요소를 버리고, 시각적으로 부담 없으면서 멋스러운 옷을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형태는 단정하게 정돈됐고, 색감과 소재의 조화도 훌륭했으며, 다양한 가운데서도 통일성을 잃지 않은 디자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특히 허리 부분을 구조적으로 변형한 페플럼 재킷은 엄청난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사실 해외 패션위크 기간에 한국인 디자이너의 쇼를 지켜보는 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기대와 걱정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부담스러운 기대와 걱정 속에 디자이너 박승건은 두 번의 연습을 거쳐 극도로 안정된 쇼를 펼쳐냈다. 쇼가 끝난 후 편안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그를 보자, 다음 시즌부터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쇼를 관람해도 되겠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MATTY BOVAN

빅토리아 베컴 같은 미니멀리스트들의 존재감에 잠시 가려졌지만, 런던은 예술적 패션의 선구적 도시다.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만들어낸 창의성의 계보를 가장 성공적으로 이어가는 디자이너 매티 보반은 모델들의 머리에 직사각형 렌즈를 부착하고, ‘rescue’ 같은 단어를 새겨 넣어 영국의 혼란을 표현하고자 했다. 얽혀 있는 매듭과 패턴, 구명복 같은 수트 등 한마디로 정신없어 보이는 쇼피스들은 그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출했다. 2016년 데뷔와 동시에 자신만의 디스토피아를 구축하고, 디자인으로 다양한 사회적 담론을 제기한 그의 시도가 브렉시트라는 국가적 상황과 맞물리자 엄청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신진 디자이너를 위해 마련된 소규모 홀에서 조용하게 진행한 쇼였지만, 그의 다음 시즌에 대한 현장의 기대감만은 다른 어떤 쇼에도 뒤지지 않았다.

CHALAYAN

후세인 샬라얀이 내놓은 새 시즌의 첫 번째 쇼피스는 춤을 추는 하나의 유기체 같았다. 그는 이토록 강렬한 오프닝 룩을 통해 움직임에 관해 고찰했고, 주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헴라인에 와이어를 넣어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형태로 완성한 스커트, 자유자재로 잘라내 걸을 때마다 나풀거리는 컷아웃 셔츠 등 이후 등장한 룩은 앞서 공개한 것과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지만, 움직임을 강조한 점에선 맥을 같이했다. 단정하고 정갈한 컬렉션은 충분히 멋스러웠다. 시어한 니트 슬리브리스 톱에 롱스커트와 샌들을 쿨하게 매치한 룩은 당장이라도 따라 입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어디선가 본 듯한 패턴과 지나치게 실용적인 디자인은 1990년대를 풍미하고, 대영제국 훈장까지 받았던 디자이너를 오랜 침체기에서 벗어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보였다.

ASHISH

명상 음악으로 유명한 칸디다 발렌티노 (Candida Valentino)와 마이클 오미스턴(Michael Ormiston)의 연주로 쇼가 시작됐다. 아쉬시 굽타는 이번 시즌 미국 오리건주 라즈니스푸람 (Rajneeshpuram)의 컬트 문화를 다룬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와일드 와일드 컨트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국적이고 종교적인 문양을 한데 뒤섞어놓은 패턴, 중간중간 나뭇가지를 성물인 양 들고 나오는 모델의 퍼포먼스, 인도의 공예 기법으로 완성한 거울 디테일이 주제를 힘 있게 뒷받침했다. 간혹 스트리트 무드를 표방한 후드 톱 같은 것이 등장해 흐름을 방해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의 통일감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문화권의 요소를 빌려와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합하는 아쉬시의 능력이 유감없이 빛을 발한 쇼였다.

HOUSE OF HOLLAND

하우스 오브 홀랜드의 새 시즌 쇼를 보고 있자니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촉망받는 디자이너이자 유쾌하고 위트 있는 옷을 만들어내는 헨리 홀랜드는 적어도 이번 시즌에 한해서는 나무에서 완벽하게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의 디스코와 광란의 파티 무드를 주제로 삼았지만, 레이스업 부츠 컷 팬츠나 요란한 색의 레오퍼드 스커트, 원색이 뒤섞인 슈즈와 백은 세련되지 않다는 인상을 줄 뿐 테마를 성공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뿐 아니다. 새 시즌 컬렉션에서는 화려한 패턴을 절묘하게 섞는 그의 능력도, 독특한 방식으로 직물을 직조해내는 하우스의 섬세한 기술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 상에 환멸을 느낀 젊은 세대에게 남은 건 밖으로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뿐’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그의 컬렉션에 남은 건 안타깝게도 실망감뿐이었다.

MARQUES’ ALMEIDA

마르케스 알메이다는 영국의 젊은 세대가 지닌 문제의식과 태도를 반영하고 그들의 젊음을 대변한다. 재미있는 건 이 방식이 매 시즌 바뀐다는 사실이다. 이번 시즌 마르타 마르케스와 파울루 알메이다는 온라인을 통해 모은 여러 명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딸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을 상상해보라’ 는 질문을 던졌다. 짧은 클립에 담긴 답의 절반은 다양성과 자기 긍정에 관한 것이었다. 뒤이어 시작된 쇼에는 그 답에 대한 마르케스 알메이다의 시각적 해석이 담겨 있었다. 전문 모델을 대신해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보통 사람들이 몸의 선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은 채 걸어 나왔고, 쇼피스는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펑크 문화를 연상시켰다. 예쁘다거나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이끌어내는 옷은 아니었지만, 젊음이라는 테마에 관해 고민한 흔적이 두드러져 의미 있는 쇼였다.

REJINA PYO

레지나 표는 미술가이자 철학자인 에텔 아드난(Etel Adnan)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옐로와 세이지 그린을 주조로 하는 아드난 특유의 희망적인 색감과 베이지, 브라운 등 레지나 표를 대표하는 색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며 런웨이를 메웠다. 레지나 표는 새 시즌 컬렉션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스타일을 완벽하게 정의한 것 같다. 자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 단추와 과하지 않은 볼륨 숄더, 고전적인 스쿠프 네크라인이 훌륭하게 그녀를 상징했고, 더없이 실용적인 디자인은 사람들의 삶에 밀착한 옷을 추구하는 그녀의 디자인 철학을 멋지게 지켜냈으니 말이다. “저는 패션을 통해 환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의 삶에 매료되었고, 제 옷이 그들의 생활과 옷장 안에 살길 바라거든요.” 한국 여성 디자이너가 런던 패션계에서 인정받고, 런던 패션위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완벽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를 체감한 순간이었다.

A.W.A.K.E. MODE

“이 컬렉션의 유일한 목적은 데이웨어와 이브닝 웨어 사이의 간극을 없애는 것입니다. 알라베르디안 추종자들의 옷장에 우아한 재치와 묘미를 더하고 싶었죠.” 패션지 디렉터이자 인플루언서 출신으로 스타일링에 능한 나탈리아 알라베르디안은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적극 활용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브라톱과 크롭트 톱, 보디 콘셔스 드레스 등 자칫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아이템에 독특한 형태의 백과 슈즈를 매치하는 것만으로 특별한 쇼를 완성해낸 것. 스타일링은 완벽했고, ‘런던의 피비 필로’로 통하는 그녀다운 간결미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창의성에는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발가락이 부분적으로 보이는 스퀘어 토 슈즈와 가죽을 엮어 만든 백은 다니엘 리의 보테가 베네타를 연상시켰고, 드레이핑 스커트와 스트랩 힐의 조합은 자크뮈스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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