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츠 디테일 톱과 쇼츠, 골드 이어링과 뱅글 모두 클로에(Chloe), 링 캘빈 클라인 워치 앤 주얼리 (Calvin Klein Watch & Jewelry).

리본 디테일 블루 드레스 쟈뎅 드 슈에뜨 (Jardin de Chouette), 프린지 디테일 베이지 슈즈 클로에(Chloe), 주얼 장식 뱅글 프라다(Prada).

세린느(Celine), 뱅글 클로에(Cloé).

블루 드레스 클로에(Chloe).

브이 네크라인 코튼 플레어 드레스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주얼 장식 스트랩 슬리퍼 에이치앤엠(H&M).

슬리브리스 톱과 팬츠 모두 산드로(Sandro), 실버 뱅글 캘빈 클라인 워치 앤 주얼리(Calvin Klein Watch & Jewelry),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새로운 작품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이슈도 없이 잠잠한 일상을 보내던 그녀가 <마리끌레르> 카메라 앞에 선 건 모두 봄바람 때문일 것이다. 겨우내 잠잠히 지내다 두꺼운 옷을 하나, 둘 벗고 좀 더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기 위해 그녀가 우리의 카메라 앞에 섰다. <불의 여신 정이>를 끝내고 주변 사람들이 호들갑스럽게 지켜보았던 여행을 다녀온 그녀는 조용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멍하니 있다가 운동하고, 운동하고, 또 운동하고. 요즘 일상은 그토록 간단하고 여백 투성이다. “연기할 때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집중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작품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가만히, 아주 잠잠하게 편안하게 보내고 싶어요. 일부러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써요. 어쩌면 저라는 사람이 본래 이런저런 생각도 많고 예민한 편이라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지도 몰라요. 연기를 하는 동안에는 제 마음이 힘들면 ‘문근영’이 힘든 게 아니라 캐릭터가 힘들다고 생각하거든요. 부대끼는 마음을 캐릭터를 통해 쏟아버리면 돼요. 그런데 평상시의 나로 돌아와 생각과 고민이 많아지면 버겁고 힘들어요. 그래서 작품을 하지 않을 때는 가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멍하니 있어요. 그게 제일 편하거든요.”

문근영의 봄은 그렇게 여백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스물여덟의 봄, 데뷔한 지 15년째 맞은 봄은 유난히 지내기가 녹록지 않다. “봄을 타는 중이에요. 원래 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괜히 뭔가 불안정한 느낌이 들거든요. 아마, 다시 일할 때가 됐나봐요. 지금 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연기로 표출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하나의 작품이 끝나고 다음 작품을 하기까지 어떤 배우는 전작의 여운 때문에 힘들어하고, 어떤 배우는 연기할 때 쏟아부을 에너지를 충전할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 애쓴다. 배우의 인생은 결국 연기를 하는 시간과 연기를 하지 않는 시간으로 나뉜다. “이젠 일할 때와 일하지 않을 때가 반복되는 것에 많이 익숙해졌어요. 꽤 오랜 시간을 반복해왔으니 몸에 배인 거겠죠. 더 이상 작품이 끝났다고 괴롭거나 힘들지 않아요. 다만 내가 연기하던 캐릭터가 사라져버린 채 오롯이 그냥 ‘나’로 돌아오면 감정을 쓰는 일이 가끔 벅찰 만큼 힘들어요. 누군가와 감정을 주고받는 일도 그렇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해내는 것도 어려워요. 그래서 감정을 쓰지 않고 평온해지려고 애써요.”

말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그녀가 좀 더 늦게 배우의 길로 접어들었다면, 올봄이 이토록 힘들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경험할 새도 없이, 중학교도 가기 전에 그녀는 대중의 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어린 배우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였고, 그녀는 일찌감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아왔다. 배우 문근영뿐 아니라 자연인 문근영에 대한 관심도 늘 뜨거웠다. 그녀의 모든 처음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누구나 가는 학교, 누구나 하는 키스신, 누구나 하는 연애. 누구나 하는 것도 그녀가 하면 지나치게 뜨거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전 뭔가를 깨부수려고 애쓰며 살지는 않았어요. 다만 제가 가지고 있는 여러 모습 중 하나, 둘 꺼내 보여준 것뿐이에요. 모든 게 제게는 자연스러운데 보는 사람들은 저를 어떤 틀에 가두고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나를 보여주기 위해 애쓴 적은 없어요. 그런데도 ‘우아, 쟤 또 뭐 하려고 하네’ 하며 지켜보죠. 가끔은 저조차 혼란스러워요.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언젠가 한 시상식에서 문근영이 연기대상을 받고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수상 소감을 말했었다. 데뷔한 지 고작 몇 달 만에 주목받고, 그 뒤로 순탄하게 필모그래피는 쌓아오며 단역, 조연을 생략하고 주인공을 연기한 그녀는 상도 많이 받았다. 20대 초반의 여배우가 연기대상을 받는 모습은 아마 앞으로 오랫동안 보기 힘들 것이다. “작품이 흥행하거나 상을 받으면 앞으로도 그 기대치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겨요. 그런 부담감이 몸에 배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 기대치를 높이게 돼요. 그래서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하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저 역시 평범한 사람이기에 항상 그 기대치를 채울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그런 것이 반복되면 괴로워질 때도 있어요.”

어쩌면 내년 이맘때쯤, 혹은 가깝게는 이 봄이 지나고 그녀를 만났더라면, 지금보다 밝고 발랄한 기운이 담긴 답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확신도 더 단단해져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에 대한 모든 질문에 확신이 없어지고 고민이 많아진 시간을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문근영에게 여전히 연기는 재미있다. 다만 가끔씩 재미만으로 연기를 하기에 배우라는 직업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게 느껴질 때는 있다. 그래서, 지금껏 연기를 해오면서 때려치우고 싶은 적도 있었다.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배우를 관두고 싶었어요. 촬영을 끝내고 학교에 돌아왔더니 친구들이 예전 같지 않은 거예요. 그 전에는 친구들과 참 잘 지냈는데 순식간에 많은 게 달라져 있더라고요. ‘난 이러려고 연기를 시작한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관두고 싶었죠. 그렇게 한 번의 위기를 버텨내고도 가끔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어요.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하다 보니 이 바닥이 야생처럼 생각되거나, 전쟁터처럼 무서울 때가 있어요. 그런 상황에 치이다 보면 나라는 사람이 이 바닥하고 안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배우로 살아가기에 저는 모자라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연기는 참 재미있는데, 다른 것 때문에 치이고 힘들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막상 정말 관둘까 생각하면 미련이 남죠. 그리고 다시 생각해요. ‘아직은 관둘 때가 아닌 것 같아. 조금만 더 해보자.’ 어쩌면 평생 그럴지도 몰라요.”

문근영의 다음 작품은 무엇이 될까? 20대가 지나기 전 꼭 하고 싶은 작품이 있을까? “딱히 욕심나는 작품이나 캐릭터가 있다기보다는 평생 잊히지 않는 작품의 일부가 되고 싶어요.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장국영 영화를 연이어 보여줬어요. <해피 투게더> <아비정전> 등을 쭉 이어 보는데 문득 그가 많이 부러웠어요. 장국영이라는 배우도, 그의 연기도 사람들이 늘 기억할 만큼 매력적이고 멋지지만, 저렇게 멋진 작품 속에서 마음껏 연기하는 그가 너무 부러운 거예요. 사람들은 그 영화를 생각하면 평생 잊히지 않는 그의 표정, 대사, 말투 같은 것을 떠올리겠죠. 지금 당장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나 작품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잊히지 않는 장면을 연기할 기회를 만나고 싶어요.” 그리고 서른이 되기 전에 여행도 더 많이 다니고 싶다.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싶어요. 누군가는 여행이란 돌아갈 곳이 있어 좋은 거라고 말하지만 저는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는 게 싫어요. 딱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아요. 오래전부터 계획 없이 떠도는 여행을 해보고 싶었어요. 여행 간 곳이 너무 좋으면 며칠 더 머물고, 혹은 몇 달을 살아보기도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친구도 사귀는 거죠. 여행을 떠나 느껴지는 자유가 참 좋아요. 그 순간은 더없이 행복하고 평화로워요.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서인지 자유로운 게 뭔지 잘 몰랐어요. 주변에서 답답하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난 충분히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자유로움을 갈망하고 있더라고요.”

수많은 다양한 삶을 이해하고 표현해야 하는 배우가 예민한 감성을 유지하는 건, 말하자면 ‘숙명’ 같은 거다. 그리고 남들보다 좀 더 풍부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건 분명 피곤한 일이다. “감수성에 제 삶이 휘둘리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단단해져야겠죠. 올해는 평화롭고 평안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매 순간 ‘지금 이것만 지나가면 더 단단해지겠지’ 생각해요. 그런데 버티고, 견디다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단단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아마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도 그럴 거예요. 선배 배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조금씩 여유가 생길 뿐이지 여전히 감정에 휩쓸리기 쉽고,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괴로운 날도 많겠죠. 배우의 숙명인가봐요.” 오랫동안 ‘국민 여동생’이라는 타이틀은 그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녀에게 ‘당신의 서른’을 묻고, 20대가 지나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 궁금하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의 불안정한 봄이 지나고 나면, 내년 혹은 그 이듬해 봄에는 그녀는 훌쩍 여행을 떠나 있을지도 모르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작품을 만나 열심히 감정을 쏟아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라면 더 재미있어하며 현장을 뛰어다닐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지금 답을 얻지 못한 많은 질문의 답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다만 지금, 불안정한 봄날이 지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