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화보

수트와 셔츠는 (Munn), 슈즈는 에이레네(Eirene), 삭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어떻게 질문을 해도 뻔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뻔한 질문을 해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답변하는 이가 있다. 좋고 나쁨을 따질 일은 아니다. 그 사람 나름의 방식이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호감이 가는 쪽은 후자다. 이지훈은 그런 사람이다. 그의 대답은 전부 질문을 앞서 나갔고 느리게 말을 고르는 와중에 잔뜩 묻어 있는 장난기는 속에 웅크린 비글 한 마리를 잠재우느라 꽤 진땀을 빼는 중이구나 싶었다. 이지훈은 데뷔 4년 차이고 주연을 맡은 적은 없다. 이지훈처럼 서서히 윤곽을 그려나가는 배우는 많지만 촬영장에서 “감독님, 그냥 저 편한 대로 해보면 안 돼요?”라고 말하는 대담한 배우는 드물다. 욕심을 감추지 못해 끙끙대는 모습이 되레 건강해 보였다. 이지훈이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신중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았으면 좋겠다. 머지 않아 본인이 원하는 만큼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길게 몸을 푼 이지훈이 응답하듯 말한다. “저 엄청 잘할 거예요.”

 

이지훈 화보

셔츠와 서스펜더 팬츠 모두 레토리크(Rhétorique), 슈즈 에이레네(Eirene).

선조가 감정적으로 힘이 좀 들어가는 역할이었죠? 그래도 정신적으로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선조 역을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 것 같아요. 드라마 속 선조 같은 모습이 나한테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고 싶었던 역이지만 선조의 마음을 잘 해석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연기를 하면서 지금껏 살면서 잘 하지 못한 표현과 생각, 행동을 하니 짜릿하고 기분이 좋더라고요. 연기 끝내고 혼자 ‘음, 괜찮았어’ 했죠, 하하. 선배님들 눈엔 건방져 보일 수 있겠지만요.

좀 무던한 성격인가봐요. 감정 기복도 없고. 없어요, 거의. 하고 싶었던 작품에 들어가기 전, 그때만 감정 기복이 심해요. 불안해서.

불안한 것 치고 대단히 잘하던데요. 그동안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데뷔한 지 4년이 되어가는데 처음엔 저를 계속 잡고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나를 놓아야 다른 걸 받아들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더군요.

잡고 있었다고요? 또 다른 내가 내 행동을 계속 관찰하는 거예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느낌이 데뷔 초반에 좀 있었다면, <최고다 이순신> 끝낸 다음부터 나를 놓으려고 많이 노력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조금씩 진실되게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연기의 맛을 안 것도 그때부터죠.

자신의 연기가 계속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 같아요. 일관되게 하는 게 싫어서 촬영할 때 감독님께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돼요?” 했다가 엄청 혼나기도 했어요. 좀 자유롭고 싶거든요. 연기를 전공하지 않아서 그런지, ‘왜 꼭 연기는 이렇게 해야 돼? 난 이렇게 하기 싫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작품 하나를 끝내면 ‘이번에는 어떻게 다르게 하지?’ 고민하면서 전에 했던 연기 톤을 지우려고 애써요. <육룡이 나르샤>도 당시에는 만족스러웠는데, 끝나고 한 달 동안 제 연기 영상을 보면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 다른 거 찾아봐요.

레퍼런스 같은 거 있어요? 어쨌든 누군가의 연기를 참고하게 되잖아요. 많이 봐요. <마녀보감> 할 때는 <글래디에이터>를 많이 봤고, 우리나라 드라마, 영화의 사극이란 사극은 다 봤어요. 지금은 더스틴 호프먼에 빠져 있어요. 연기자로 데뷔하기 전에 축구를 오래 했거든요. 운동만 한 터라 연기에서 밑천이 드러나는 느낌이 싫어서 다른 사람들의 연기를 더 많이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비전공자니까 저렇지” 하는 말은 듣기 싫거든요.

지금까지 한 작품 중에 어떤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처음 연기를 하게 해준 <학교 2013>이랑 <육룡이 나르샤>요. 대선배들과 같이 하다 보니까 무섭고 압도되기도 했는데, 이분들과 50회를 촬영하고 나면 내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기대됐어요. (변)요한이 형이랑 둘이 ‘이 신을 내가 압도하려 하지 말고 선배님들과 호흡을 맞추어 무사히 오케이를 받으면 그것만으로 우리가 성장할 거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거든요. 하고 나니까 맞는 말이에요. 천호진 선배님을 처음 뵌 날이 생각나요. 촬영 시작하기 전에 선배님이 혼자 눈감고 앉아 계시더라고요. ‘졸리신가?’ 생각했는데 촬영 시작하자마자 저를 딱 쳐다보는데 그 눈에서 나온 아우라 때문에 순간 머리가 하얘져서 제 대사를 못 했어요. 천호진 선배님은 그냥 웃으시더라고요. 넌 네 거 하라고. 이런 프로들의 세계에서 버티려면 더 강해져야겠구나 싶었어요. 잘해서가 아니라 많은 걸 배웠기 때문에 <육룡이 나르샤>가 기억에 남아요.

이지훈은 어떤 사람이에요? 여리고, 하하, 아직도 부끄러움 많고 집에서는 철없는 아들이고, 친구들 앞에서 말 많은 수다쟁이고, 회사 식구들과 있을 땐 얌전 떠는 새침데기고. 저도 저를 잘 모르겠어요.

어떤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뽀뽀하고 싶어요. 하하하. 제가 연기를 시작하면서 역할에 대한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놓은 게 있어요. 다 이뤘거든요! 왕, 학생, 대기업 직원, 사랑에 빠진 남자.

대기업 직원은 왜요? 친구들은 다 회사 다니는데 저는 안 다녀봐서…. 하나 남은 게 가슴 아픈 사랑에 빠진 남자인데 다 필요 없고 사랑이 들어가 있으면 돼요. 서로 사랑한다던가 일방적으로 사랑한다던가 사랑을 받는데 외면한다던가. 저 그런 거 되게 잘 표현할 수 있거든요.

막 징징대면서 연애하는 남자 역할 잘할 것 같아요. 여자친구한테 떼쓰고 소리 지르는. 맞아요. 저 잘해요. 지질한 연애도 해봤고 예쁜 연애도 해봤고 나쁜 남자도 돼봤고 결혼을 생각했던 연애도 해봤죠. 내년에 서른이니까 서른 넘기기 전에 한번 하지 않을까? 안 되면 아이폰으로 혼자 찍어서라도 인스타그램에 1분 드라마로 올리려고요. 그래야겠어요.

요즘 서른은 옛날 서른이랑 다르잖아요. 그런데도 서른이 생의 큰 문턱으로 느껴져요? 20대에 할 수 있는 연기가 분명히 많은데 늦게 시작하기도 했고, 연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아주 빨리 갔거든요. 몇 작품 하지도 못 하고 20대가 끝나가는데 30대도 빨리 지나가면 나 어떡하지?

연기가 한창 재밌나보네요. 너무 재밌어요. ‘물 올랐다’. 스스로.

하하. 그건 누가 붙여주는 거잖아요. 아니,(웃음) 그냥 제가 하면서 재밌는 거 있잖아요. 무섭고 촬영장 가기 싫을 때도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은 빨리 가서 상대 배우랑 뭔가 배우고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인터뷰어라면 자신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싶어요? 얼마나 잘하고 싶니?

얼마나 잘하고 싶어요? 대체 불가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요. 더스틴 호프먼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스타는 아니잖아요. 연기로 인정받은 배우고 할리우드의 모든 배우가 호프먼이랑 해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작했거든요. 저도 그러고 싶어요. 어떤 배우와 호흡을 맞춰도 다 조화를 이루게. 캐릭터와 작품이 좋으면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할 거예요. 내 신념대로 가는 게 좋아요. 저 엄청 잘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