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에 연기를 시작해 스물다섯이 된 박은빈은 2016년을 차곡차곡 채우며 보내는 중이다. 맥주 두 캔을 입 안으로 콸콸 쏟아부으며 음주가무를 즐기고 음담패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청춘시대>의 ‘송지원’을 내려놓은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님 제가 모실게요>에서는 당차고 씩씩한 여자 ‘오동희’를 입는다. 인생의 대부분을 배우로 살아왔지만 이제야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인물을 처음 대할 때의 생경함을 뒤로하고 어떤 캐릭터여도 자신의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비로소 생겼다. 모든 질문에 막힘 없이, 당차기보다는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는 단단한 대답들은 20년간 연기하는 동안 고민하고 돌아보며 자신을 찾아낸 결과물이다.
주말 드라마이니 편수가 엄청 많겠다. 50부작이긴 한데 드라마 내용은 진도가 빠른 편이다. 가벼운 소란스러움이 편하게 느껴질 것 같다. 힘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기보다는 착한 드라마다.
드라마처럼 맡은 역할도 맑고 밝은 느낌이겠다.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작가님이 설명하기를 “나는 캔디를 원하지 않는다. 좀 더 지적이고 강직한 빨강머리 앤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다. 어릴 때 <빨강머리 앤>을 보지 않아 백영옥 작가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었다. 순수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줄 알고 자신의 처지를 잘 알지만 비굴하지 않고, 염치를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 당차게 살아가는 씩씩한 아이다.
생각이 많은 편인가? 보통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말이 잘 안 나오는데 대답이 물 흐르듯이 매끄럽다. 생각이 많은 편이긴 하다. 말할 때는 상대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상대가 표정이 없으면 내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말하기가 힘들다.
소심한 A형? 사람들이 내 혈액형을 잘 맞힌다.(웃음) 대범할 땐 엄청 대범한데 조심성이 많은 것 같다.
<청춘시대>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바로 다름 작품에 들어갔다. 결정하기 쉬웠을 것 같지 않다. 가장 고민한 부분은 휴학이다. 휴학을 하면 졸업이 1년 늦춰지니까 부담도 많이 됐고, 시기상 이 선택이 옳은지 고민이 컸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많이 들었는데 많은 분이 앞으로 수많은 작품을 할 테고 <청춘시대>와 다른 모습을 연이어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뭔가 더 배울 수 있으리라 확신했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려서부터 작품을 많이 하긴 했지만 한동안 학업을 병행하며 자주 얼굴을 비출 수 없었고, 아직 나 자신이 사람들에게 크게 각인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좀 더 대중성을 갖추고 싶었다.
연기와 공부를 병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껏 작품을 시작하면 휴학을 해왔다. 한 과목 수업에 네 번 이상 결석하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F학점을 받는다. 그리고 수업을 한 번 빠지면 내용의 흐름이 끊기는 것도 싫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다. 인생의 수많은 길 중에 너무 빨리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나? 다섯 살 때 연기를 시작했는데 어려서부터 내 직업이 배우로 확정되었고 앞으로 계속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지 않았다. 공부를 하면서 다른 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배우를 하다 상처를 많이 받으면 언제든지 훌훌 버리고 떠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왔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상처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왔다. 상처를 받아 갈 곳이 없더라도 나 자신을 죽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미래를 배우라고 확정 짓지 않았다. 상담가가 되고 싶기도 했고 교수나 화가, 패션 디자이너, 정신과 의사 등 꿈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다. 왜 미래를 불안해했는지, 무엇 때문에 어려서부터 불안한 미래를 걱정했는지. 그래도 잘한 일인 것 같다.
지금껏 상처 받은 일이 있나? 그럼. 그런데 정말 힘든 순간이 오면 잘 모르고 지나가는 것 같다. 슬픔을 맞으면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거쳐야 한다고 하지 않나. 충분히 슬퍼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분노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큰일이 닥치면 서둘러 마음에 시멘트를 덮기 바빴다. 좀 더 나를 들여다보고 감싸주지 못하고 일상에 치여 산 것 같다. 어느 순간 내 감정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화나는 일이 있으면 잘 뒤돌아보고 자문자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감정을 내쫓았던 것 같다. 이제는 남이 나에게 상처를 주면 내가 나 자신을 잘 보살피고 상처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심리학과가 아니었다면 재수를 했을 것 같다. 학교를 가기 전부터 목표가 확실했다. 심리학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나 자신을 알고, 남들도 좀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를 죽이지 않으며 살아야 하고, 그러려면 보고 느끼는 내 세상을 넓혀야 한다. 더 나아가 내가 좋은 사람이 된다면 나보다 아픈 사람을 감싸고 치유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런 저런 얘기를 들어주며 도움이 되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공부를 하며 배우가 아닌 다른 길을 생각해봤을 것 같다. 대학에 와서 나 자신을 탐구할 시간이 많았다. 연기를 시작한 후로 행복한 삶을 살았는데 지치고 허덕이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잊고 부담과 책임감이 커지면서 그간 연기를 어떻게 해왔는지 모르겠다 싶은 시간이 있었다. 어느 순간 과연 내게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더라. 그런데 친구들이 모두 직업을 찾으며 나와 똑같은 과정을 겪는 것 같았다. 그간의 내 고민들은 결국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던 거다. 그리고 지금은 배우라는 직업에 스스로 확신이 생겼다. 어떤 작품이든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면 생경한 마음에 어렵고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예전에는 답을 잘 모르겠으면 휩쓸리듯 어찌어찌 흘러갔는데 이제는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스물다섯이면 청춘이자,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나이다. 박은빈의 청춘은 어떤 모습인가?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지금도 청춘이지만 나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몰랐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고 그걸 받아들이기까지 힘들기도 했다. 자아도취 하기보다는 부끄러운 순간이 많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 얘기하더라. 왜 그림자를 보지 않고 빛만 보려 하느냐고. 자신의 그림자를 누구보다 깊고 짙게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20대가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게 있나? 연애.
설마 모솔? 그렇게 됐다.(웃음) 내가 꿈꾸는 로망 같은 연애를 하고 싶다. 그런데 내 나이에 아직 실현되기 힘든 연애인 것 같다. 친구처럼 편하고 소소하고 마음을 나누는 연애를 꼭 해야지.
지금껏 해본 일탈은? 스물한 살 때 갑자기 혼자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노래방도 가고 밥도 먹고 명동에도 갔다. 그런데 노래방에서는 좀 부끄러웠다.(웃음) 다음 곡 번호를 누르는 동안 정적이 흐르니까 이상하더라. 요새도 스트레스 받으면 가끔 버스 여행을 간다. 버스를 타고 음악을 들으며 돌아다니는 거다.
예전보다 머리가 많이 짧아졌다. 배우로서 파격적인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나? 단아한 사람 말고 똘기 넘치는 사람 같은. <청춘시대> 감독님이 저에게 자신이 연기자의 인생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관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넌 안 된다고 하셨다.(웃음) 나름대로 일탈을 연기할 때 는 자유롭고 즐거운 기분이 드는데 실제 생활도 그러면 오히려 불안할 것 같다. 25년 동안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내 가치관이 바뀌는 건 그만큼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는다는 거 아닐까? 인생을 뒤바꿀 만큼 큰 충격은 받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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