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메이크업을 받을 때 깔깔 웃으며 재미있어하던데. 메이크업을 받는 건 내게 생소한 일이어서 항상 재밌다.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 메이크업은 쿨하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메이크업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핑클’ 같고 좋다. 하하.
서울에서 첫 공연을 마친 소감이 어떤가? 재미있고 의미 있었다. 북미부터 유럽,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비행기를 타고 투어를 다니며 1백20회 넘게 공연하는 것이 무척 지치는 일이기도 했지만 서울 공연은 매우 특별했다. 막연하게 늘 서울에 오고 싶었지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프로젝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시작한, 나 자신을 위한 작은 프로젝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난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꼭 어머니가 지켜봐주시는 것처럼 신기한 우연의 일치로 느껴진다. 음악은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모든 일이 술술 풀렸고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공연을 하면서 특히 좋았던 건 항상 나에게 “네 회사는 어디니? 보수는 어떻게 받니?”라고 물어보던 큰 이모에게 증명할 수 있었다는 점. 공연 도중에 큰이모에게 ‘이 관객들이 내 회사’라고 농담을 했었다.(웃음)
첫 앨범 <Psychopomp>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의 자신만의 작업이라고 생각했었나? 맞다. 많은 레이블에 그 앨범을 보냈지만 아무도 원하지 않았고 아주 조그만 ‘옐로케이 레코드’라는 레이블에서 그걸 음반으로 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투어 공연은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 프로젝트를 하기 전에 난 펑크 밴드의 기타리스트였고 3년 동안 투어 공연을 했지만 돈도 못 벌고 사람들의 관심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몹시 지친 상태였다. 음악을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뉴욕에서 마케터로 일하는 동안 피치 포크 등 많은 매체에서 <Psychopomp>에 대한 좋은 평이 들리기 시작했다. 마케터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뒀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지만 퇴근할 때면 늘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은 텅 빈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음악을 만드는 일이 내 직업이 됐고, 난 24시간 일을 하지만 절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내 꿈의 직업이다.
2집을 준비하는 마음은 1집 때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1집은 온전히 혼자서 작업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이것저것 시도할 수 있었다. 내 침실에서 녹음하고 믹싱을 해서 사운드도 로파이다. 새 레이블에 소속돼 만들기 시작한 2집은 마감 날짜와 예산의 제한이 있었다. 각각 자신의 역할을 맡아 정해진 시간 내에 빠듯하게 작업했기 때문에 훨씬 더 구조적이다. 질 좋은 스튜디오에서 작업해 사운드도 훨씬 하이파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가까이 되었을 때 2집이 나왔는데 작업에 착수하기 전 투어를 돌면서 나처럼 엄마나 아빠를 잃은 어린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이런 일이 내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 자신에게,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고민하면서 이 일을 딛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2집에 착수했다.
2집은 1집에 비해 정돈되고 차분하며 세련된 느낌이다. 앨범의 구조를 정해가면서 자신을 가장 크게 지배했던 감정은 무엇인가? 1집은 취약한 나를 그대로 드러냈다. 이게 나라는 느낌으로. 2집을 작업할 때는 1집의 스타일을 유지하되 질적으로 더 높은 성취를 이루는 데 신경 썼다. 내가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더 좋은 작품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핵심적인 감정을 꼽으라면 ‘성숙’이다. 그래서 내겐 어느 정도 기념비적인 앨범이다.
전에 몸담았던 ‘리틀 빅 리그’는 펑크 밴드였다. 당시의 음악이 지금과 어떻게 달랐는지 궁금하다. 나는 미국 서부 출신이고 리틀 빅 리그의 나머지 세 남자는 동부 출신이다. 배경이 서로 달랐기 때문인지 음악을 만들 때도 차이가 많이 났다. 그때부터 보컬 멜로디, 기타 리듬, 가사를 다 내가 썼기 때문에 리틀 빅 리그의 음악을 들으면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느낌이 난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사운드가 훨씬 강렬하고 터프하다. 반면에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는 팝적인 부분이 많다. 내 음악은 사람들에게 ‘듣기 좋다’는 반응을 얻기 쉽지만 리틀 빅 리그의 음악은 워낙 사운드가 세 호감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펑크 밴드의 여자 멤버로서 평가절하되는 부분도 많았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여자애지만 기타를 이렇게 잘 칠 수 있어’라고 늘 증명해야 했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로 활동하면서는 그걸 증명하는 과정이 없어도 되니까, 내가 내 음악을 하는 거니까 더 좋다.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팝 뮤직을 만들고 싶다. 가족들도 ‘듣기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음악.
어릴 때 체스 챔피언이었다는 기사를 봤다. ‘Cool Nerdy’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인데 음악과 관련이 없는 행위 중에 음악적 영감이 되는 행위가 있나?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많은 걸 배우게 했다. 피아노, 축구, 발레, 승마 등을 했고 게임을 좋아해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라는 게임을 앱으로 만들기도 했다. 대학에서는 글쓰기와 영화를 전공했다. 또 필름 프로덕션을 배워서 내 뮤직비디오를 직접 연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내 영감의 원천이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도 했었다. 그래서 서울에 오래 있는 거다. 지금 책을 쓰고 있다. 어머니와 한국 음식에 대한 에세이. 아팠던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생각하면서 건강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글로 남기고 싶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인가? 이런 국제적인 밴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설명하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특히 더 예민한 문제라는 걸 안다. 설명하자면 내가 자란 오리건주에는 아시아인이 별로 없다. 아시아 문화라고 했을 때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이 일본 문화다. 나는 일본에서 만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많이 접하고 일본 음식을 먹으며 자랐기 때문에 일본 문화에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 않나.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 하지만 ‘코리안 브렉퍼스트’라고 했을 때 미국인들에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분명치 않다. 단순히 하나의 이미지로 생각한 것이다. 이름 때문에 오해를 받는 일이 있어서 나는 일본인이 아니고 아침도 안 먹는다고 항상 말한다. 내 트위터 프로필에는 PS. Korean이라고 써 있다.
서울에 있는 동안 뭐 하고 지냈나? 매해 여름 한국에 와서 외가 식구들을 만난다. 이번에는 큰이모와 시간을 보내고 아, ‘예지’와도 만나기로 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조만간 서울에 온다고 해서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글 쓰는 작업을 할 계획이다. 주기적으로 와서 팬들과 만날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숙달되어서 TV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나가고 싶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음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곡을 하나 추천한다면? 이번 앨범에서 내가 좋아하는 곡은 ‘Road Head’다. 여태까지 선보인 곡과 달리 일렉트로닉을 살짝 가미한 곡이라 이 곡을 출발점으로 이전의 음악도, 이후의 음악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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