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낙원의 밤>이 2020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그 반응을 느끼지 못해 아쉬울 것 같아요. 박훈정 감독님의 작품인 데다 시나리오도 워낙 재미있어서 결과물이 좋을 거라는 기대는 있었습니다. 제목도 아주 멋지고요. 제아무리 낙원이라도 밤이 되면 그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시적인 제목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더 베니스에 가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어쩔 수 없죠.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낙원의 밤>에서 ‘태구’를 연기했다고요. 저도 신기했어요. 감독님이 저를 생각하고 써주신 줄 알고 황송한 마음이 들었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냥 이름을 태구로 지은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엄태구가 아니라 박태구였습니다. 영화 속 태구는 한마디로 쫓기는 인물이에요. 어떤 일로 검은 조직의 타깃이 되어 제주도로 도망간,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연기했습니다.
태구라는 인물이 품은 감정은 무엇인가요? 아픔, 허망함, 자책 이런 것들이 생각납니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신세계> <브이아이피> <마녀> 등 박훈정 감독의 전작에 나오는 인물들을 참고했나요? 감독님의 전작은 모두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작품들이지만 <낙원의 밤>을 준비하면서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만 집중했습니다. 반대로 촬영하면서 감독님을 알게 되고 다시 보니 전작들이 새롭게 느껴지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어요. 촬영장 숙소에서 우연히 영화 채널을 통해 <마녀>와 <신세계>를 다시 봤는데, 이‘ 장면에서 이런 생각을 하셨겠구나’, ‘이 현장에서는 이러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 재미있는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감독님이 되게 멋있어요. 감독님 덕분에 촬영하면서 좋은 경험을 많이 했어요.
배경이 제주도였어요. 누아르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풍광을 가진 곳이잖아요? 저는 아주 좋았어요. 사실 현장에 가면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제주도는 숙소에서 현장을 오가며 일출과 일몰을 보는 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지치고 힘들었던 그날의 피로가 녹는 기분이 들었어요.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제주도에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음식도 맛있고, 커피가 맛있는 카페도 많았어요. 아이스 바닐라 라테.(웃음)
<낙원의 밤>을 찍던 당시의 기억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힘들지만 아름다웠다. 아이, 죄송합니다. 너무 오그라드네요.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일도 많았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 설레면서 긴장되는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결과물이 어떻기를 바라나요? 당연히 재미있길 바라죠. 또 연기하면서 제가 표현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못한 건 편집됐으면 좋겠고.(웃음) 조마조마합니다.
<낙원의 밤>을 포함해 전작인 <차이나타운>과 <밀정>으로 인해 센 캐릭터로 각인되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실 그건 배우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센 캐릭터라도 각인되는 것 자체로 감사해요. 어쨌든 그 연기를 사람들이 인상 깊게 본 거니까요. 아무런 캐릭터가 없는 것보다 그런 수식이라도 갖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그런 말을 들으면 다른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생깁니다.
자신의 연기에 스스로 만족하는 편인가요? 전에는 전혀 안 그랬어요. 만족할 만한 순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나온 부분 있으면 잘‘ 했다. 다행이다. 여기 좋네.’ 이런 생각을 해요.
여유가 생긴 건가요? 여유가 생겼다거나 그사이에 갑자기 연기가 엄청늘어서 그런 건 아니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 같습니다. 또 연기만 바라보면 조금 덜 만족스러운 장면도 편집과 영상, 사운드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 더 나은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걸로도 좋다고 생각하게 됐고요.
영화 <밀정> 이후 연기가 재미있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도 같은 마음이 드나요? 네. 그 전에는 연기가 늘 힘들고 어려웠는데, <밀정>을 하면서 ‘이런 부분은 재미있다’는 걸 발견했고 그건 지금도 그래요. 그렇지만 아직도 어려움이 훨씬 많습니다.
연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 답이 없기 때문이죠. 사람이 기계가 아니라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 만큼 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준비를 많이 했는데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고요. 속상하죠. 어떻게 해도 안된다고 느낄 땐 절망적이고요. 역할이 커질수록 부담감도 커집니다. 그런 부분이 힘든 것 같아요. 그런데 맘처럼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명확한 정답이 있다면 더 좋을까요? 그러면 연기하는 재미가 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전 어릴 때부터 깜지 같은 걸 잘했어요. 누가 ‘너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해’ 하면 그것만 해내면 되니까 좋았죠. 그래서 연기도 비슷하게 접근합니다. 해야 할 캐릭터를 만나면 그것만 파고들어요. 그게 아니면 딱히 할 일도 없고요.(웃음)
그런 면에서 최근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 <바퀴 달린 집>은 무엇보다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정해진 캐릭터도, 해야 할 대사도 없는 리얼리티 형식이니까요. 예능 프로에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출연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영화 <판소리 복서>를 하면서 김희원 선배님과 친분이 생겼어요. 그걸 알고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왔고, 선배님께 연락했더니 “부담 갖지 마. 절대 나 때문에 나오진 말고. 그런데 난 네가 나오면 좋지” 하셔서“아, 네 선배님” 하고 답했어요. 그렇게 나가게 됐어요.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어요. 혹자는 너무 조용하고 낯을 가려서 오히려 주목하게 되는 ‘조용한 인싸’가 아니냐고 하던데요. 예능 프로가 처음인데 카메라도 너무 많고 선배님들도 계셔서 긴장을 많이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모습을 시청자들이 재미있게 봐줬다는 사실에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리고 촬영할 때는 워낙 긴장해서 잘 몰랐는데 나중에 방송을 보니까 성동일 선배님을 비롯해 다들 절 굉장히 많이 챙겨주셨더라고요. 뒤늦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예능 프로에서 볼 가능성도 있을까요? 초대해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나갈진 모르겠습니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그냥 자주 쓰는 것 같습니다. 배달한 음식이 왔을 때도, 좋은 얘기를 들을 때도, 매니저 분이 촬영장에 데리러 와줄 때도.
예능 프로뿐만 아니라 연기 외적인 시도를 해보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사실 연기할 때 워낙 힘들어서 그 외에는 딱히 뭘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리고 연기할 때마다 맡은 캐릭터가 하는 일을 해내야 하거든요. 그래서 연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해보곤 있습니다.
연기를 위해 도전한 일 중 지금까지 이어오는 게 있나요? 계속 하는 건 없습니다. 하하, 작품을 준비하고 촬영하는 동안 지겹도록 해서 그런지 끝나고 빠져 살진 않는 편이에요.
앞으로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나요? 그냥 한 작품 한 작품 지금처럼 충실히 잘해내고 싶습니다.
잘해낸다는 건 어떤 걸까요? 그 인물이 진짜 살아 있다고 느껴지는 연기를 하면 잘하는 거 아닐까요.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