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과 <지금 우리 학교는>의 가장 뜨거웠던 순간으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 달리 느껴지는 것이 있나요? 가까이에 있을 때도 뜨겁다 이런 걸 체감한 적이 없어요. 원래 잘 들뜨지 않는 편이고,또 의식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태도도 없어요. 다만 주변에서 너무 잘돼서 좋겠다고 하니까, 그 말에 현혹돼 움직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잠시 했어요.
사실 배우를 들뜨게 만드는 건 본인에 대한 관심보다 본인의 연기에 대한 관심일 거예요. 기억에 남는 반응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두 작품이 연이어 공개되다 보니 ‘얘가 걔야?’ 하는 말을 엄청 많이 들었어요. 그 말이 좋았어요. <오징어 게임> ‘지영’에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던 이들이 <지금 우리 학교는>의 ‘나연’을 보며 욕을 하는 거예요.(웃음) 그게 저에겐 엄청난 칭찬으로 다가왔어요.
전작의 인물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의도한 부분이 있었나요? 촬영 시기가 겹쳤어요. 오늘은 지영을 연기하고, 다음 날은 나연을 표현하 면서 왔다 갔다 하니까 혼동하지 않고 몰입하는 게 중요했어요. <지금 우리 학교는> 촬영장에 갈 때는 편견이나 의심을 가득 품고 갔고, 반대로 <오징어 게임>을 찍으러 갈 때는 편견이고 뭐고 다 비워내려고 했어요. 그렇게 애썼던 기억이 있으니까 다르다는 말을 들으면 감사하더라고요. 노력을 알아봐주는 것 같아서요.
<지금 우리 학교는>을 만든 이재규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이유미 배우에 대해 ‘순수하고 맑아 보이는 동시에 굉장히 영리한 순간이 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감독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아주 커요. 제 의견을 많이 수용해주셨거든요. 나연이라는 캐릭터가 돌발 행동을 많이 하잖아요. 대본을 보면 ‘어떻게 한다’, ‘어떤 말을 한다’ 이런 식이지, 그 앞에 전제가 되는 ‘어떤 식으로’가 없더라고요.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 감독님께 이런 감정이기 때문에 이렇게 할 것 같다고 제 생각을 말하면 대부분 제 의견에 맞춰주셨어요. 계속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맞춰 갔기 때문에 극 안에서 나연이 더 내밀하게 그려지지 않았나 싶어요.
스스로 바라볼 때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어떤 배우일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 생각보다 열심히 하는, 생각보다 생각이 많고, 근심걱정이 많은, 하하. 아주 많은 고민과 상상을 하면서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어 대비하고 촬영장에 가거든요. 촬영장에서는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잖아요. 그때 준비해놓은 게 없으면 어떤 연기든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아요.
‘생각보다’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궁금해요. 저보다 훨씬 많이 생각하고 더 치열하게 임하는 분들도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저한테 ‘생각보다’라는 표현을 자주 써요. 이유는 모르겠지만요.(웃음)
작품을 보며 인식한 이미지와 다른 모습이 많기 때문일 것 같아요. 저도 좀 전의 답을 듣기 전에는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배우일 거라고 추측했거든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은 질문을 해요. 일단 대본에서 맡은 캐릭터에 대한 팩트를 찾아 모아요.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가지를 뻗듯 질문을 이어가죠.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다보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기고, 마침내 제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되는 것 같거든요. 질문의 수가 많을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캐릭터가 몸에 붙는 것 같아요.
그간 맡은 역할 중 다수가 극 안에서 다 설명되지 않은 아픈 사연을 품은 인물이었어요. 안쓰러운 역할 전문 배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요. 왜 나는 매번 이렇게 어려운 인물을 만나는지 의구심이 들 법도 해요. 오히려 저는 그게 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남들이 모르는 걸 나 혼자 생각하고, 비밀처럼 간직하면서 연기하는 게 꽤 재미있거든요. 나중에 관련 인터뷰를 하게 되면 질금질금 말하긴 하지만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제게 어떤 사연을 간직한 듯한 이미지가 있다는 거잖아요. 제 얼굴에서 다양한 서사가 보인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배우로서는 좋은 것 같아요. 고난과 아픔이 많은 캐릭터를 맡았다는 사실이 하소연거리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양하게 시도해볼 수 있어 고마운 일이라 생각했죠.
신작 소식을 들었어요. 드라마 <멘탈코치 제갈길>에서 슬럼프에 빠진 쇼트트랙 선수 ‘차가을’ 역을 맡았다고요. 한 문장의 설명을 읽었을 뿐인데, 이번에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끊임없이 질문하는 중이에요.(웃음) 계속 성장하는 인물이라 그 성장의 발판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좋은 건 저라는 사람도 덩달아 성장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가을을 만나면서 제가 더 단단해지고 건강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스케이트도 열심히 타고 있어요.
스케이트 배우는 건 어때요? 당연히 힘든데, 한편으론 얼음판 위에서 달리는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처음 빙판에 발을 내디딜 때는 제대로 서지도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진다는 게 신기해요. 자유로운 느낌도 들고요.
최근 출연한 두 작품이 연이어 화제를 모은 터라 다음 작품을 선택하는 데 부담감이 들지는 않았나요? 워낙 연달아 터져서 당연히 다음 작품에 부담감이 들어야 되는데, 생각보다 그런 마음이 안 들어요. 지금 하는 작품이 너무 좋거든요. 그리고 차기작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나 스스로 나를 갉아먹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어요. 스스로 갉아먹는 순간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질 것 같거든요. 그래서 부담감이 생길 때마다 지금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애써요. 좋은 배우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저한테는 중요하니까요.
지금까지 오는 데 가장 큰 동력이 된 건 무엇인가요? 항상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힘들거나 정체될 때마다 곁에 있어준 사람들. 서로. 힘을 주고 응원해준 사람들이요. 등산하면서 멈추고 싶을 때마다 뒤에서 등을 밀어주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뒷걸음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구사일생 친구들도 그중 하나죠? <지금 우리 학교는>을 찍을 때 94년 생 동갑내기 친구들끼리 만든 모임이라고요. 제가 ‘여기 우리 다 94네? 우리 촬영하면서 다치지 말자.’ 이러면서 얼렁뚱땅 만든 모임이에요. 맞아요. 그 친구들과 서로 많이 의지하고 응원했어요. 실제로도 서로 지켜주는 역할이었어요. ‘열심히 하자. 지금은 힘들어도 앞으로는 다 잘될 거야.’ 그러면서 믿어주는 사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구사일생이지 않나.(웃음)
이제 마무리할까요.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계절에 대한 감흥이 있는 편인가요? 둔감한 것 같아요. 아침 시간대에 촬영이 많으면 그나마 계절을 체감하는데, 그런 경우가 별로 없거든요. 그리고 이상하게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밤에 야외 촬영을 하면 추워요. 촬영하다 보면 따뜻한 봄과 여름은 빨리 가고 금세 겨울이 오는 기분이 들어요.
오늘은 촬영도 빨리 끝났으니 따뜻한 계절을 만끽해도 좋겠네요. 흔치 않은 봄날이잖아요. 집에 가서 자야죠.(웃음) 사실 제가 밖에서 돌아 다니는 것보다 집에서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해요. 할 일 다 끝나면 집에 가서 씻고 바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놀거리를 생각해요. 밖에서 함부로 뭘 시도해봤자 결국 집에 가고 싶어지거든요.
완벽한 집순이군요. 저한텐 집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곳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