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이 다 되어가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다녀온 지요. 요즘은 조금 정리가 됐어요. 무(無)의 상태가 되어가고 있죠. <드라이브 마이 카>가 없어진다, 잃는다, 이런 의미는 아니고요. 그곳에서 좋은 일을 최대치로 만끽하고 왔으니 지금은 마음을 비워내는 중인 것 같아요. 다음을 생각하면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잖아요.
그곳의 명성이 주는 무게가 있잖아요. 더군다나 처음이라면 그 무게에 눌리기 쉬운데, 박유림 배우는 그저 즐거워 보였어요. 저는 되게 재미있었어요. 영화로만 보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내 눈앞에 있어? 이러면서요.(웃음) 감독님을 포함해 <드라이브 마이 카> 팀 모두 함께해서 더 행복했고, 그래서 저도 눈치 보지 않고 즐길 수 있었어요.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 후회 없이 즐기자는 마음이었어요.
첫 영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아카데미 영화제. 어떤 식으로든 자랑할 거리가 많은 특별한 작품이지만, 정작 배우의 마음 깊이 남은 건 다른 부분이지 않을까 싶어요. 맞아요. 뭐랄까. 저 자신을 믿게 됐어요. 이전에는 연기할 때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어 의구심도 들고 확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을 하면서 감독님이 제 안에서 나온 것들을 믿고 소중히 생각하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 말을 따르다 보니 저에 대한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다른 것에 휩쓸리거나 흔들리지 않고 연기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이 이 작품을 하며 받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밀어준 고마운 작품이에요.
수어 연기는 어땠나요? 배우는 과정이 어려웠을 것 같기는 해도, 눈빛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방식의 지평이 넓어졌을 거란 생각도 드는데. 제가 쑥스러움을 많아 타서 대화할 때 상대의 눈을 잘 못 마주쳐요. 그런데 감독님이랑 얘기할 때는 서로 쓰는 언어가 다르다 보니 눈을 보게 되더라고요. 통역을 통해 정확한 내용을 알 순 있지만, 눈을 마주치면 감독님의 말이 어느 정도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수어를 배우고 연기할 때도 물론 정확하게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한편으론 눈으로 대화하는 데 집중하려고 애썼어요. 저로서는 굉장히 신기하고 유익한 경험이었어요.
영화 속 ‘유나’를 떠올리면 확실히 눈이 가장 먼저 생각나요. 봉준호 감독 역시 박유림 배우의 눈빛을 두고 호소력이 있어 집중하게 된다고 칭찬했죠.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그건 아마 수어의 힘일 거예요. 제가 감독님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눈을 본 것처럼 관객도 제가 연기한 유나를 그렇게 바라봤을 테니까요.
지금 눈빛에 작품을 향한 애정이 가득해요. 엄청 크죠. 좀 전에 마음을 비우는 중이라고 했는데, 실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관객 역시 아마 한동안은 박유림 배우를 <드라이브 마이 카>의 유나로 기억할 거예요. 이 점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나요? 아직은 부담이나 걱정이 없어요. 당연한 거잖아요. 이 작품을 통해 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아직은 다른 작품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로 기억되는 거, 전 좋아요. 한편으론 반전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긴 해요.
그 반전이 영화 <발레리나>일까요? 일단 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발레리나 역으로서 보여줄 새로운 면모도 있고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발레를 배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작은 스포일러였나요? 아니요. 이거 되게 신기한 일인데요. 아까 영상에서 소개한 노트에도 발레리나 스티커가 붙어 있잖아요. 그건 <드라이브 마이 카> 촬영할 때 귀여워서 산 거예요. 간직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배워볼까 싶어서 발레를 시작했는데, 몇 달 후에 이 작품에 캐스팅된 거예요. ‘스스로 이렇게 복선을 만들어놓은 건가? 잘 선택해서 배웠는데?’ 싶더라고요.
아름답고 무자비한 복수를 그린 이야기라고요. ‘민희’는 어떤 인물인가요? 예측 불가. 가늠할 수 없는 사람. 제게 민희의 첫인상이 딱 그랬어요.
기대되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에요. 박유림 배우의 목소리도, 전종서 배우와 어떤 호흡을 보여줄지도요. 저도 기대돼요. 특히 전종서 배우는 언젠가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터라 더 기대가 커요. 카메라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연기하고, 그게 스크린에 어떻게 보여질지 많은 물음표를 가지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영화 밖 얘기를 조금 해볼까요. 연기하지 않을 때는 어떤 모습이에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유나와는 다르겠죠? 한 인터뷰 자리에서 어떤 기자님이 되게 놀란 적이 있어요. 영화 속 모습은 정적이고 차분하잖아요. 그 모습을 기대하셨는지, 제가 크게 ‘안녕하세요!’ 했더니 ‘엇?’ 이런 표정으로 바라보시더라고요. 유나와 전 다른 부분이 많아요. 꽤 웃기고, 허당 기도 있어요. 의외로 멋지고요. 하하.
의외로 멋지다고 말한 부분이 궁금한데요. 저 알고 보면 행동파예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야 직성이 풀려서 궁금하면 그냥 해요. 발레도 그렇게 배우기 시작했고, 얼마 전에 운전면허도 땄어요. 이런 점을 의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저는 멋지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웃음)
즉흥적인 면이 있나 봐요. 저만의 어떤 규칙은 있는데, 그 안에서 즉흥적인 편이에요. 가장 즉흥적이었던 건 아카데미 시상식을 위해 미국에 가서 혼자 여행한 때였어요. 마지막 날이었는데,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보고 싶은 거예요. 시간도 정하지 않고 그 순간 궁금한 곳을 찾아갔어요.
어디에 갔어요? 파머스 마켓이랑 샌타모니카 해변이요. 필름 카메라로 사진도 많이 찍고, 과일도 사 먹고, 혼자 거닐기도 하고 그랬어요. 제가 바다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바다의
어떤 점이 좋아요? 이게 되게 묘한 감정인데, 바다를 보면 아름다우면서도 공포가 느껴져요. 수면 위로 반짝이는 윤슬을 보면 참 예쁘잖아요. 그런데 그 밑 심해를 생각하면 공포감이 생겨요. 그 점도 매력적이고, 수영하는 것도 좋아해요. 바다에서 노는 사람들 보는 것도 재미있고요. 그래서 여행 가면 바다는 꼭 가는 편이에요.
면허도 땄으니 운전해서 바다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요. 아직은 앞이랑 사이드미러밖에 못 보고 가서요.(웃음)
운전도 연기도 지나온 길보다 나아갈 길이 훨씬 많을 거예요. 그 길에서 잃지 않고 가져가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요? 제 눈이 지금처럼 좀 살아 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눈이 초롱초롱하잖아요. 그걸 계속 간직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눈이라고 말했지만, 마음가짐이기도 해요. 마음이 변하는 순간 눈에서 다 티가 난다고 하잖아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나오는 말이 생각나네요. ‘진실로 타인을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 대사요. 분명 다카츠키가 가후쿠에게 하는 말인데, 구도는 마치 관객에게 말하는 것처럼 시선이 정면을 향하고 있잖아요. 저는 그 장면이 볼 때마다 마치 저에게 하는 말 같아서 불편하고 찔려요. ‘지금까지 나는 나를 제대로 알려고 했나?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본 건 아닌가?’ 싶고요. 그 말이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리는 계기가 되어줬어요. 연기란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시선을 바꿔서 생각해보니 실은 저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 같더라고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행위, 지금은 그게 연기인 것 같아요.
쉽지 않은 길이네요. 너무 어려워요. 이제 발을 떼서요.(웃음) 의외로 멋진 면도 발견하고, 실망도 하고 그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