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오랫동안 젠더로 구분되어온 세상의 단단한 편견에 균열이 나기를 기대한다’라는
바람으로 시작한 젠더프리 프로젝트가 어느덧 일곱 번째 여정을 맞았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고, 성별의 경계 없이 자유롭게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여성 배우들은 각자의 힘을 보태왔다.

변화의 조짐을 발견해 설렐 때도, 정체되는 것 같아 막막할 때도, 이 걸음이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매해 함께하는 얼굴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음을 동력 삼아 2024년의 마리끌레르 젠더프리는 8인의 배우와 힘차게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우리의 걸음이 보다 넓고 다양한 세상에 닿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젠더를 넘어 한 사람으로

정인지

그레이 멀티컬러 롱 코트와 팬츠 모두 Gabriela Hearst. 앵클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아버지, 전 열두 개에 1달러짜리 싸구려예요.
아버지도 그렇고요. 일곱 주를 돌아다녔어요.
그 값밖에 못 받는 인간이 되고 만 거예요.
아시겠죠? 아버지, 난 쓰레기라니까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비프 役

네이비 재킷과 베스트 모두 EENK.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속 한 장면을 택해 연기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쏟아내는 이 대사를 어떤 식으로 재해석해 표현한 건가?

원작이 19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부자의 삶을 담아냈다면, 나는 이를 2024년 한국 모녀의 대화로 재해석했다. 엄마가 갖는 기대감, 그렇지만 그에 부응할 수 없는 딸의 입장에서 이 말들을 쏟아내보면 어떨까 싶었다. 요즘은 독립이라는 단어가 꼭 자식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부모도 자식에게서 독립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만들어놓은 틀과 기대 안에 머물 수 없다는 의미를 담았다. “아버지!”라고 외치지만 그 안에는 다른 해석을 담아볼 수 있겠다 싶었다.

젠더프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훨씬 전부터 성별로 나뉘어진 경계를 허무는 길을 오래 고민해왔다 들었다.

동료 배우들과 자주 얘기 나누는 주제 중 하나이고, 작품을 하면서도 늘 상기하며 배우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당장 떠오르는 건 몇 년 전에 뮤지컬 <마리 퀴리>를 하면서 든 생각이다.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라는 인물을 준비하면서 원칙으로 삼은 건 ‘여성을 앞세우지 말자, 투쟁하는 태도를 갖지 말자’였다. 그가 자신을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라 소개할까? 아닐 거다. 그는 그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을 끊임없이 발견하려 했고, 대단한 성취를 이뤄낸 과학자일 뿐이다. 알고 보니 여성이었을 뿐. 그런데 연기를 하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로 가면 오히려 그를 나약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성들이 해냈다는 식으로 푸는 방식도 관객에게 개운하고 호쾌한 기분을 안겨줄 순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성’이라는 수식을 떼어내는 작업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맞다. 젠더프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이 시점에 깊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 멋있는 거 하고 있어, 깨어 있는 사람들이야’하는 생각에 도취되어 오히려 또 다른 고정관념을 만드는 것은 아닐지 예민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지금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서, 그러니까 더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그냥 사람에 집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살면서 하는 고민 중에 ‘여성으로서’로 시작하는 건 24 시간 중 24분도 될까 말까다. 그보다는 나라는 사람이자 배우로서 하는 고민의 범주가 훨씬 큰데, 작품 속 인물을 탐구할 때도 같은 방식을 적용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다.

사람이자 배우로서, 지금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사람으로서는 마흔이라는 나이를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고 있다. 마흔부터가 진짜 성숙해지는 나이라 생각하는데, 살아가는 태도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것 같기 때문이다. 배우로서는 나에게도, 관객에게도 취향을 강요하지 말자고 생각한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선택하는 범위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여성 배우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행보를 이어가려 노력 중이다. 나라는 배우를 특정하게 규정하고 싶지 않은 거다.

그런 의미에서 만나보고 싶은 인물이나 서사가 있다면?

옛날에는 전면에 나서서 주도하고, 앞서서 주먹 쥐고 나아가는 여자 아이들이 적었다. 그런데 여성 히어로 캐릭터가 나오고 나서 자신이 가장 앞에 서도 된다는 걸, 넘어졌을 때 툭툭 털고 일어나면 된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사실 그냥 멋있어서 만든 것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런 히어로를 보고 용기를 얻는 거다. 그런 힘을 주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아마 할 수 있는 여성 배우들이 아주 많을 거다.

그 히어로 역할에 꽤 잘 어울릴 것 같다.

히어로인데 많이 느린. 하하.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