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오랫동안 젠더로 구분되어온 세상의 단단한 편견에 균열이 나기를 기대한다’라는
바람으로 시작한 젠더프리 프로젝트가 어느덧 일곱 번째 여정을 맞았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고, 성별의 경계 없이 자유롭게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여성 배우들은 각자의 힘을 보태왔다.

변화의 조짐을 발견해 설렐 때도, 정체되는 것 같아 막막할 때도, 이 걸음이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매해 함께하는 얼굴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음을 동력 삼아 2024년의 마리끌레르 젠더프리는 8인의 배우와 힘차게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우리의 걸음이 보다 넓고 다양한 세상에 닿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결국은 사람

정영주

블랙 재킷 Balmain, 이어링 Invisible Collage.

“우리가 뭘 하든 죄책감 가질 것도 없고
자부심 가질 것도 없어요.
당연한 거 하고 있으니까.
가장이 가족 지키는 거.”
영화 <콘트리트 유토피아> 영탁 役

블랙 재킷 Balmain, 데님 팬츠 Marithé François Girbaud, 이어링 Invisible Collage.

젠더프리라는 화두를 적극적으로 이끌어온 배우 중 한 명이다. 여성 배우들을 모아 극을 제작하기도 했고, 젠더프리 역할을 연기한 적도 있다.

연기를 하면서 가장 갈증이 났던 부분이니까. 배우가 관객을 연기로 설득하는 데에 성별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숱한 도전을 해왔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을 택했다.

앞뒤 상황 을 떠나서 짧은 몇 마디 문장 속에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는 명확한 확신이 담긴 말이라 마음에 들었다.

더불어 고민한 다른 작품도 있었나?

영화 <범죄도시> 속 ‘마석도’(마동석)의 말. “진실의 방으로.” 그런데 이건 너무 단말마에 가까울 정도로 짧아서.(웃음) <넘버 3>에서 가장 유명한 조필(송강호)의 대사도 생각했는데, 그건 송강호 배우라 기억에 남는 장면이지 않나 싶었다. 내 식대로 해봐도 재미는 있었겠지만 그만한 용기는 또 안 났다. 하하.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한 2018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젠더프리를 풀어내는 방식과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변하고 발전하는 것 같기도, 때론 정체되거나 후퇴한다고 느낄 때도 있다. 배우로서는 어떤 흐름이 읽히는지 묻고 싶다.

지금은 오히려 도태되는 느낌이 다. 그게 좀 아쉽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만들어놓은 공간이 협소해지는 것 같달까. 에너지를 부릴 만한 재원은 팽창되는데 이를 소화해낼 공간은 부족하다. 그게 긍정적인 에너지로 오지 않고 ‘이러다 터지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래서 반성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반성이 없으면 그다음에 뭘 꺼내 건드려야 할지 모르니까. 그래도 꾸준히 상황을 인식하고 다시 살피는 사람들이 있어 다시 가볼 수 있겠다는 희망은 품게 된다.

답을 듣고 보니 젠더프리를 향한 여정이 앞으로도 길고 지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을 키우면서 분홍, 초록, 빨강 등 색의 경계를 둔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이 색 옷 안 입으면 안 돼? 나는 좋은데 친구들이 여자 옷 입었다고 놀려”라고 말하는 거다.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그런 인식을 배운 걸까? 어른들에 의해 학습됐을 거다. 그때부터 ‘여자는, 남자는’으로 시작되는 인식이 생기고 비틀어진 젠더 성향을 만든다 생각한다. 그러니 이를 허물기 위한 과정이 지난하지 않을 리가 없다.

이 시점에서 배우는 무엇을 지향점 삼아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사람. 고귀하지만 하찮은, 굉장히 위대하지만 유해한 이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탐구해야 한다. 특히 배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치를 상상해내야 하는데, 선을 긋기 시작하면 그만큼 자신의 한계가 줄어 들 수밖에 없다. 결국은 사람 얘기 하자는 거다.

성별, 나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오롯이 사람을 그려냈다 싶은 작품은 무엇인가?

2019년 영화 <서스페리아>. 그건 틸다 스윈턴이라는 배우의 힘이었다. 1인 3역을 소화해냈 는데 특히 80대 남성 정신과 의사 ‘클렘페러’를 연기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에겐 성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분장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그의 발성과 움직임은 80대 남성을 완벽하게 이해한 결과였다. 너무나 멋있었고, 부러웠다.

마지막으로 젠더프리를 향해 가는 모든 여성 배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응원의 말이 있다면?

너무 뻔하고 쉬운 얘기 일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기준을 두지 않으면 세상은 단 1cm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말하고 싶다. 나는 키가 너무 작아서, 통통해서, 나이가 많아서 같은 생각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구와 비교를 해서? 사실 배우는 이런 사소한 것에 흔들리기 쉽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시선이 나를 향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