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오랫동안 젠더로 구분되어온 세상의 단단한 편견에 균열이 나기를 기대한다’라는
바람으로 시작한 젠더프리 프로젝트가 어느덧 일곱 번째 여정을 맞았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고, 성별의 경계 없이 자유롭게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여성 배우들은 각자의 힘을 보태왔다.

변화의 조짐을 발견해 설렐 때도, 정체되는 것 같아 막막할 때도, 이 걸음이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매해 함께하는 얼굴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음을 동력 삼아 2024년의 마리끌레르 젠더프리는 8인의 배우와 힘차게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우리의 걸음이 보다 넓고 다양한 세상에 닿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멀리 바라보며

김혜준

이 이미지는 대체 속성이 비어있습니다. 그 파일 이름은 mck_65e7f4327d4fe.jpg입니다
슬리브리스 드레스 YCH, 네크리스 Chloé.

“여기 있잖아. 여기서 너한테 괴롭힘당할 때마다
저기서 계속 뛰어내리고 싶었거든. 너는 뭐가 이렇게 다 쉽냐?”

드라마 <D.P.> 조석봉 役

레더 드레스와 부츠 모두 Alexander McQueen.

그동안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주체적인 성향의 여성 인물을 연기해왔다.

그간 여성 캐릭터에게 흔히 요구되는 관습이나 태도의 틀을 깨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 드라마 <킹덤>의 ‘중전’은 권력욕과 야망을 가진 조선시대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파격적이고, 드라마 <구경이>의 ‘케이’는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평소 수줍음이 많고 연기할 때도 많은 용기가 필요한 편이라 과감한 면을 지닌 인물에게 끌리는 것 같다.

배우로서 작품 속 성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체 감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대범하거나 과감한 여성 캐릭터에 주목하는 작품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다 보니 사랑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 연기가 즐겁고, 대본을 보는 폭도 넓어졌다. 또 내가 연기한 <킹덤>과 <구경이>의 캐릭터들이 당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건 이러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고 본다. 이제는 성별을 떠나 연기로 캐릭터에 타당성을 더해 보는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 같다.

여성 캐릭터를 보고 ‘멋지다, 근사하다’라는 생각이 든 작품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

<구경이>에서 날 놀라게 한 장면이 하나 있다. ‘용숙’(김해숙)이 ‘구경이’(이영애)와 목욕탕에서 처음 대면하는 장면인데, 여성 배우들이 누아르 작품을 찍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누아르영화를 보면 꼭 문신을 한 남성 캐릭터들이 목욕탕에서 중요한 대화를 나누지 않나.(웃음) 권력을 쥐고 있는 용숙이 어두컴컴한 목욕탕에서 구경이에게 공조를 제안하던 그 장면이 굉장히 새롭고 인상적이었다.

작품 속 인물을 이해할 때 어떤 면을 중점적으로 살피나?

인물이 선택하는 방향을 보게 되는 것 같다. 말하고자 하는 게 명확히 있는지, 말과 행동에 목적이 있는지를 살피고 표현하려 한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인물이 작게나마 성장하는 과정이 그려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최근 참여한 드라마 <킬러들의 쇼핑몰>의 ‘지안’도 극 안에서 꾸준히 성장하는데, 나 또한 지안을 연기하며 작품 전체에서 캐릭터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배우면서 배우로서 한 걸음 나아간 기분이 든다.

배우로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 있나?

올해로 서른이 됐다. 20대를 돌이켜보니 작은 것 하나에도 무너지면 어쩌나 하고 자주 불안해한 것 같다. 여전히 원초적으로 사그라들 수 없는 불안은 그저 받아내는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지나온 작품을 통해 얻은 경험들 덕에 더 멀리,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는 힘이 생겼다.

더 자유롭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배우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웃음) 하지만 연기에는 세상을 이루는 개개인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어떤 작품을 보며 삶이 바뀌는 듯한 경험을 한 적이 있고, 누군가는 내가 연기한 캐릭터를 통해 순간순간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거나 새로운 꿈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그 작은 변화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